"어머니, 한국은 찜통 속 더위라면요, 독일은 바삭바삭 구워 죽여요."
어머니가 한참을 웃으셨다. 말장난에 좋아하시는 시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전화기를 타고 선명해왔다.
그렇게 바삭 마른오징어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원이 딸린 독채 주택에 언제 한번 살아보나 독일 살이 내내 부러워했었는데, 그 여름만은 예외였다. 한인 슈퍼인 한독 마트로 향하는 길을 따라 선 집들의 앞마당 잔디는 누렇게 뜨기 시작했다. 비싼 물값에도 말라 바스러지는 잔디를 살리겠다고 독일인들은 하루 종일 스프링클러를 틀어댔다. 아침 9시면 눈을 뜨고 다닐 수 없게 해가 높았다. 물뿌리기는 하루의 시작과 동시에 시작돼서,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9시나 돼야 멎었다.
안드레아 거스키가 독일인인 줄은 알지 못했다. 미리 작가의 국적이나, 연혁을 알고 가면 사전 지식이 작품을 필터 없이 보는 것에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생겼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이름에서부터 액자처럼 박히는 것들만으로도 필터 없이 작품을 보기란 쉽지 않다. 벌거숭이 같은 마음으로 그림 앞에 서고 싶은 마음에 부러 작품을 다 보고 나서야 제목을 확인하고, 전시가 끝나서야 작가를 확인하곤 한다.
거스키의 전시실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이 있고, 독일어가 있다. 그 또는 그녀가 독일인인 것을 알게 되는 순간신기한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전시 속 사진들이 나를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오버 오젤로 옮겨다 놓는다. 헤센주의 그날들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과거보단, 앞으로의 날을 생각하고 싶어 떠오르는 기억들을 떨쳐버리려고 안감힘을 써본다.
그러다, 한 사진 앞에 섰다.
한 손엔 장바구니, 한 손은 딸아이의 씽씽카를 끌고 가던 날, 꽂아 내리는 태양을 이기지 못하고 말라죽어가는 잔디와 같은 색이 벽 가득이다. 액자 속으로 손을 뻗으면 종말의 날처럼 뜨거운 열기가 내 피부를 녹여버릴 것 같은 누런 색이다. 작품의 제목은 " 라인강 III". 2018 년도 작품이다. 역시....
독일은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실내를 찾기 어렵다. VHS (Volks hochtaunus schule, 시립 시민학교) 독일어 수업에서 만난 Y의 남편은 L가전 에어컨 사업부 주재원이었다. Y 남편의 법인 영업 매출 그래프는 독일의 평균 기온 상승과 정비례할 테다. 에어컨 설치를 하려면, 국가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 복잡한 절차가 있는 독일이라, 에어컨 판매량이 저조한 편이었는데, 주재원 파견이 될 정도로 실적이 증가했다는 이야기이겠다.
그 여름은 Aldi에서 구입한 중국제 선풍기 한대로는 더위를 이기기가 힘들다 싶었다. 에어컨 한대 설치하고 싶다 했다. Y 엄마에게 실없는 소리를 해보는 셈이었다. 일단 전기료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개인 소유의 주택에 에어컨 설치를 하겠다면 Rathaus, 동사무소며 아파트 집주인 연합회며 온갖 기관들을 방문하니라 주재 기간을 몽땅 쓰고도 남을 것이라 예상했다. 기발한 생각이라며, 나를 격려해줄 줄 이는 아마 전 프랑크푸르트 한인 중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남편조차도 말이다. 선풍기 한대를 더 사라고 했었을 테다.
2018년 여름의 한가운데, 우리는 집에서 1시간 거리의 근교에서 캠핑을 했다. 한국사람은 타고난 열대야 전문가들이다. 우리네야 더워 잠이 오지 않는 것쯤은 별 일이 아니다만, 독일인들에겐 낯설고도 새로운 일이었을 게다.
밤새 옆텐트, 뒷 텐트의 독일인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우리 텐트 주변에 노상방뇨도 한다. 여적까지의 캠핑장과는 한참 다른 그들의 행동에 당황스러웠지만, 캠핑장을 골라도 한참을 잘못 골랐나 보다 라며 내 정보력을 탓했다. 다음날 9시가 되니 어젯밤의 난리통은 이해가 되었다. 9시부터 독일 중부를 말라 비틀어버리는 태양 아래 텐트는 사막의 비닐하우스처럼 뜨거워졌다. 한시도 텐트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텐트를 걷고 정리하려면 해가 조금이라도 내려야 할 수 있다. 이 더위에 정리 작업을 시작한다면 남편과 나는 탈진할 예정이다.
아침을 해먹는다고 1시간 정도 움적 거리고 나니 기진맥진이다. 뙤약볕 아래 캠핑 의자에서 놀던 얘들도 지친 기색이다. 캠핑장 있는 소도시 다운타운의 버거킹으로 일단 대피했다. 버거킹은 미국 것이니까 하고 작은 희망을 품어보았다. 에어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또는 얼음 가득 콜라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실낱 같은 시원함을 기대했다.
갑작스러운 지구 온난화의 습격을 독일이 대비했을리 없다. 어제밤 독일인들 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기색의 버거킹을 느낄 수 있다. 버거킹 안쪽 어린이 놀이터는 숨만 쉬어도 폐 속 까지 뜨거워질 지경이어서 남편과 나는 어린이 놀이터가 보이는 그늘 아래 야외 테이블에서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존경스러운 것은 아이들이었다. 그 온도를 이기고도 놀아보겠다는 의지의 화신들로 변신하여, 미끄럼을 타고 정글짐 사이를 돌아다녔다. 앞머리가 바짝 젖어 이마에 붙고, 티셔츠가 땀으로 뒤범벅이 될 때까지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콜라 속 한 개쯤 떠다니는 얼음을 녹기 전에 먹어보겠다고 찾고 있었다. 독일의 음료에는 얼음이 없다. 얼음 인심이 야박한 것이 아니라 여름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기에 얼음은 필요없는 것이였었기 때문이다.
20년 전 배낭여행을 하던 스무 살의 호박씨는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베네통 매장으로 돌격하여 다운 점퍼를 사 입었다. 8월의 한가운데 온 독일은 에어컨 틀어둔 듯 서늘했기 때문이었다. 파리에서 민소매로 헐벗게 돌아다니다, 유레일을 타고 베를린으로 넘어오자 여름의 천국이 독일에 있었다. 여름이 이렇게 상큼할 수도 있구나. 라임 한 잎을 띄운 레모네이드처럼 청량한 포츠담의 상수시에서 이름처럼 근심 없는 여름을 충전할 수 있었다.
독일은 에어컨이 필요한 여름이 아니라, 라이트 다운 한 벌 쯤은 상비하고 다녀하는 여름의 나라였다. 영원히 그런 여름의 나라라고 생각했지만 독일도 끓는 지구마을 속 동네니 예외일 수 없었다.
거스키는 뒤셀도르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였다. 2018년의 여름을 정점으로 다음 해는 다행히 굽는 듯한 여름은 아니었다. 우리는 뒤셀도르프를 향해 흘러가는 라인강이 충분히 흐르는 요하네스 베르그의 와인 가도에서 시원한 여름을 즐길 수 있었다. 작년에만 이상 기온이었던 거야라 생각하면, 풍부한 라인강물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아이들이 남편과 물수제비를 뜨고, 나는 가지고 간 작은 스케치북에 풍경을 그렸다.
독일의 이 여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닌 척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들었다. 지구가 더워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해도 내가 뭐 어쩔 수 있겠어? 나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냐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은 수위가 정상으로 올라온 라인강에 떠내려 보내 버린다. 한독 마트에서 사 온 미국쌀로 만든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먹으며, 멋진 여름이야라고 아이들에게 말해본다.
아이들의 마흔에 라인강은 충분히 흐르고 있을까? 아이들의 마흔에 요하네스 베르그의 여름을 즐길 수 있을까? 더워지는 지구에 대한 근심은 라인강에 실어 보내려야 보낼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해맑게 물수제비를 뜨던 찰나가 거스키의 명작보다 더 선명히 내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문그림
Over the horizon, 김선우,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