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약속한 바대로 벚꽃잎이 눈 내리던 지난 월요일에 서초구 수화협회의 문을 두드렸다. 브런치에 써서 남겨둔 일은 실행해 옮겨야지 싶다. 글 쓰는 순간은 오롯이 나인 순간이다. 내가 만든 세상인 글 속에서는 내가 창조주다. 그러니 되어라 하고 말하면 되어야 할 것만 같다.
수화 협회는 서초4동 노인정과 건물을 나눠 쓰고 있다. 노인정은 코로나로 문 닫힌 지가 오래다. 협회도 문을 닫았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 절반, 브런치와 한 약속 지키고 싶은 마음 절반이다.
건물 안이 어둑하고 문을 안으로 밀어 내보니, 밀린다. 다행히!
왼쪽 바닥에 작은 집이 한채 있다. 고양이. 맞다, 이 건물 안에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
수화 수업은 6월 시작이며, 줌으로 진행될 예정이라는 설명을 해주신 통역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모든 신경은 동동이에게로 향해 있다. 고양이 동동이는 통역사님이 지난여름에 만나셨다. 협회 옆으로 난 길마중 길에는 길 고양들이 나름의 구역을 가지고 지내고 있는데 그 수가 10여 마리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장맛비가 억수 같이 내리던 날 건물 앞 공원 발치 수풀에서 혼자 울고 있는 것을 통역사님이 데리고 들어오셨다 하셨다. 장마가 일주일 넘게 계속되고, 동동이는 건물에서 그 길로 협회 고양이가 되었다.
수화는 하나의 새로운 언어다. 새 말이 좋다. 세상을 보는 색다른 창이 생기는 것은 멋진 일이다.
통역사님이 마음을 읽으신 듯 언어 배움의 고비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꺼내신다. 단어를 외우기 시작하는 단계에 이르면 손을 놓고 싶어 진다. 죽음의 계곡, 데스 밸리를 넘길 만한 강한 동기가 없다면, 포기하기 십상인 것이 외국어다. 나에겐 그런 동기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는 중에 동동이가 다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건물 처마의 그림자가 없는 봄볕에 가서 부드럽게 앉는다. 우아하고, 가벼운 그 살아있는 것의 모습에서 시선을 띠기 힘들다.
첫 독일어 수업이 떠오른다. 한국인 주재원 와이프들 6명으로 구성된 반이 만들어졌다. 한독 마트라는 한인 마트 입구의 게시판은 이제 막 도착한 주재원에겐 생명수 같은 곳이다. 마트 게시판에 한국어로 적힌 왕초보 독일어 교실의 이메일 연락처를 신줏단지처럼 소중히 적어 연락을 취했다. 첫 수업에 가보니 비슷한 시기에 독일로 발령이 난 이들로 구성이 되어있었다. 내가 막내였고 유일한 30대였다.
영어와 독일어가 게르만 언어라는 언어의 계통 안에 있어 유사성도 높아, 시작은 영어를 하는 내가 제일 빠르다. 눈이 트이기 시작하니 게으름이 나고, 같이 수업을 듣는 언니들이 ' 넌 무엇을 그리 쉽게 하냐'라고 반쯤 질투 섞인 평을 해주었다. 이만하면 됐지 싶었다. 단어마다 성별이 있어, 관사가 달라지는 단계에 이르자 이제 그만하자 싶었다. A1, A2의 독일어 급수 시험도 문제집만 사고 도전하진 않았다.
2달여 남은 수화 수업은 무엇으로 지구력을 길러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동동이를 보러 와야겠다는 생각에 통역사님께 질문을 해본다.
"줌 수업이 대면 수업으로 바뀔 확률은 없을까요?"
단호하게 그럴 일은 없다고 하셨다. 통역사님이 구성하고 기획하셔서 정부지원을 받는 수업인데, 코로나 이전에는 옆 경로당 공간을 빌려서 진행하셨다고 한다. 경로당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공간을 빌리기도 쉽지 않고, 코로나도 걱정돼서 올해는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 고정이라 하신다.
일단 시작하고, 끈질김은 그다음에 생각하자 싶다. 요새 이런다. 질르고 보는 이 변화가 신기하기도 반갑기도 하다. 남의 나라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말 통하는 내 나라에선 뭘 못해 싶은 생각이 행동력의 뿌리다.
살짝 했던 고민의 답은 집에 돌아오니 해결되었다. 동물이라면 죽고 못 사는 딸아이에게 동동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는 동동이보다 수화에 더 관심이 많다. 수업을 같이 들으면 안 되냐고 한다. 나보다 멋진 딸이다. 나도 아이의 나이에 이러했던가? 아이와 함께 수업을 들으려면 예약해둔 오후 2시 수업에서 저녁 8시 수업으로 시간을 변경해야겠다. 시간 변경은 전화 한 통이면 되지만, 빌미로 동동이 면회를 가야겠다. 딸이 자기 빼고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다. 완벽한 계획이다.
농아협회 건물 주변 벚꽃은 다 떨어졌지만, 이젠 잎이 무성하니 푸르다. 딸과 동동이와 함께 봄볕 아래 벚꽃나무잎을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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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그림
묘작도, 변상벽, 18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