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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와 치보를 사랑합니다.

by 호박씨

독일엔 치보 Chibo라는 브랜드가 있다. 마치 편의점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편의점을 설명해주기 어렵듯, 치보는 한국인으로서 이해하기 시간이 걸리는 가게다.

편의점은 이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명품도 사고, 반값 택배도 붙이고, 장도 본다. DNA 속엔 쇼핑러의 유전자가 있다고 자부할 만큼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호박씨에게 첫 편의점의 경험은 놀라웠고, 마흔이 넘은 지금도 편의점에 설레긴 마찬가지다.

치보가 그랬다.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치보는 새로움을 넘어서 경이로웠다.



처음 치보를 만난 것은 Shop in shop 형태의 치보였다. Rewe는 독일의 국민슈퍼로 rewe 매장 내에 미니 치보 코너가 있었다.

처음 만난 치보에는 1,2주 후가 되면 필요하겠다 싶은 물건이 구비되어있었다. 치보를 만난 것이 봄이었는데, 봄에 들을만한 노래를 모아둔 CD와 그 CD를 들으면서 맬 법한 스카프 그리고 봄에 입기 좋은 아동용 레깅스가 비치되어있었다. 봄에 제철인 흰 아스파라거스, 슈파겔을 요리할 전용 냄비나, 껍질 깎이도 있다.


각 아이템 별로 종류는 한 종이다. 레깅스는 핑크 땡땡이와 네이비 무지가 묶음으로 되어있는 형태다. 가격은 적절하고, 품질은 조악하지 않으며 한 종류라고 해도 그거면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두 가지 상반된 기분도 드는데 첫 번째는 '내 생활을 들여다보고 있나'라는 의혹이다. 이와 함께 다음 주를 준비시켜주는 엄마에게서 받는 배려와 비슷하다는 당혹스러움도 온다.

독일의 슈퍼 선반에는 1년 내내 같은 생필품들이 비치되어있고, 시즌 매대는 철을 한 달 정도 앞서 필요한 계절상품들이 진열되어있다. 따라서 막상 필요한 때가 닥쳐서는 찾기 쉽지 않은 경우가 번번이 발생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슈퍼에 가면 진저 쿠키를 전혀 살 수 없다고 보면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딜 가야 무엇을 구할 수 있는지 뻔해지고, 아마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뭣이든 미리 사 두는 독일인과 같은 소비 패턴을 가지기 시작했다. 프로 쇼핑러 DNA 소지자답게 말이다.

도착 하자 마자는 필요한 물건을 구하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분노가 끓어오르곤 했었다. 그런 순간마다 치보가 부드럽게 나를 위로해주었다.

" 자자, 흥분하지 말라고. 여기 있다네."

심지어 치보는 온라인 웹사이트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독일 기업으로는 드문 일이다. 믿는 구석, 든든한 치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치보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은 CD 였다. 그때도 지금도 메마른 일상 속에서 감성이라는 것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트가 좋고 삐딱선 타는 것도 즐긴다. 평화로운 가운데 소리 지르고 싶고, 잔잔하면 돌멩이를 던져 파장을 일으키고 싶어 진다.

먹거리를 구하는 것이 어지간히 해결되기 시작하자, 눈여겨보았던 치보에서 '봄에 들으세요.' ( 독일어에 아직 까막눈이였으니, 아마 그렇게 쓰여있을 것이라 그림으로 추측했다.)라고 쓰여있는 CD 한 장을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집었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둘 때는 긴장을 하곤 했는데, 독일어를 해야 하며, 계산원이 불친절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 CD를 사는 날만큼은 너무나 설레서 CD가 잘 계산되고 있는지, 무사히 CD를 사게 되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했던 것 같다.

내 손안에 들어온 봄. 장 본 것을 새카만 아우디 A3 트렁크에 넣고, CD 비닐을 조심스레 벗겨본다. 독일어로 되어있어 제목을 알 수 없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노래들은 모두 독일어로 되어있다. 만족스럽다.




독일에서는 장을 매일 보러 다녀야 한다. 전기를 아끼느라 냉장고가 작고, 환경을 보호하느라 제품들은 소량 포장되어있다.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조금씩 장을 본다.

김치 재료로 쓸 Chinese Kohl 아시아 배추나 Bärlauch 명이나물 따위는 10개씩 또는 박스째 집어 계산대에 올리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버텨야 한다. '이걸 네가 다 먹을 거야? '또는 '집에서 도대체 뭘 키우는 거야? '식의 시선들이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투명인간처럼, 또는 파파고 번역기처럼 원하는 것을 찾고 나면 기가 딸린다. 장을 보고 집으로 운전해가는 시간들이 지치고 피곤했다. 라디오를 틀면 미국 Pop이 나오곤 했다. 영어는 지긋지긋해.

치보의 CD 컬렉션은 훌륭했다. 근래의 독일 노래와 철 지난 노래가 적절히 배합되어있었다. 날씨나 주변 들판과 어울리는 노래들이었다. 더욱이 일상 속 무뚝뚝함을 탑재한 독일어들과는 다르게 왠지 호박씨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철 따라 치보의 셀렉션을 듣다 가끔은 라디오도 들었다. 마음에 드는 주파수를 찾은 것이다. FFH는 채널이었는데 CD에 있던 최신곡과 동일한 것도 나오곤 해서 치보와 결을 함께 하는 듯했다.


아들을 테니스나 야구에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은 아슬아슬한 마음이었다. 어린 딸이 혼자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때가 많아 성급한 운전을 하곤 했다. 어린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다니는 나를 이웃이 신고하면 어쩌나, 경찰서를 가게 되면 서툰 독일어로 어떻게 나를 설명하지 상상하곤 했다. 도착시간을 알리지 않고 오는 아마존 택배를 받으려고 아이가 현관문을 열어주면 어쩌지 하고 겁이 나곤 했다.

집으로 출발하면서 아이에게 한국서 가져간 인터넷폰 집전화로 다짐을 받는다. 매번 같은 일을 한다. 벨이 울려도 문을 열지 말라고 말이다. 엄마는 열쇠로 집에 들어가니 절대 문 열지 말고, 응하지도 말라고 거듭 확인을 하고 운전을 시작해도 불안함은 작아지긴커녕 더 거대해진다.


음악이 힘이 되더라. 아티스트가 부르는 아름다운 음성을 들으면 아이는 괜찮을 것이며, 너는 무사히 집에 갈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독일어를 공부할 때는 못 알아듣는 가사를 알아들으려고 안간힘을 쓰니라 잠시 아이 생각을 잊었다. 가수의 음성이 감미로울 때는 음성에 취해 아이를 혼자 두고 왔다는 죄의식이 잠잠해졌다.


테니스를 데려다주고 오던 가을날, FFH에서 블랙핑크 로제의 음성이 흘러나온 날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 망망대해 같은 독일 들판에 아이에게 달려가는 막막한 나에게 기댈 구석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휘몰아치듯 불러일으켰다. 차를 잠시 길가에 대고 핸드폰으로 로제의 노래를 녹음했다. 대륙 건너 운전하는 차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어라니....


지금도 로제만 나오면 친구 본 듯 반갑다. CD플레이어도 없으면서, 운전하며 음악 들을 일이 없음에도 치보에서 산 CD들은 모셔두고 산다. 베란다 한편에 색별로 고이 구분해 보관해두었다.

예술로 먹고살겠다고 예술 수업을 듣는 요새다. 예술이, 막막했던 나를 구해주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차례차례 찾아온다. 고맙다. 완전히 잊힐 만큼 힘들었던 시간들이 아니어서 말이다. 아직은 저 아래 지하실 같은 무의식 속에 잠가둘 만큼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억을 소환시켜주는 글들이 고마운 요새다.


대문그림

Summer Girl, 로버트 루이스 리드,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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