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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n 30. 2022

경단녀와 비정규직이 꿈을 꾼다, 여왕의 오후에

여왕의 오후라는 이름은 우연히 탄생했다.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활자를 붙잡아 만든 이름이었다.


1년 전 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동생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신분당선을 타고 미금역 친정집으로 자발적 출근을 했다. 누구도 나의 출근을 환영하지 않았다. 동생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마음먹은 꿍꿍이를 찬성하지 않았다.

동생은 영어 과외를 하고 있었다. 과외. 마음만 먹으면 시작할 수 있는 비정규직이다. 나 또한 직장을 그만두고 도전한 한의대 시험에 실패하고 과외를 시작했었다. 20년 전에는 오징어 발 과외 전단지를 붙였다면, 2020년의 동생은 맘 카페에 공지를 올렸다.

누가 봐도 동생은 멀쩡했다. 친정엄마도 아버지도, 그리고 남편도 알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동생의 눈빛이었다. 20년 전 정확히 동생과 똑같은 눈빛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호박씨, 나였다.


그날 우리는 친정집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 다 내려놓고, 백지상태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것 그냥 전부 이야기해봐."

동생의 눈이 붉어졌다. 휴지로 콧물부터 닦기 시작했다. 호박씨라는 이름의 드라마 주연은 나와 동생인데, 이 드라마는 배경 음악이 없다. 반짝이는 눈물도 없다. 훌쩍이는 콧물, 넓어지는 모공, 붉어진 눈을 한 우리 자매는 꼴이 말이 아니다. 엄마의 부엌에는 정적이 흐른다. 그 어떤 OST도 없다.


"Tearoom. 티룸이 갖고 싶어."

티룸이라고? 갑자기?

꼬르동 블루 런던의 파티시에 과정을 수료하고 동생이 취직한 곳은 Claridge's 호텔은 영국 여왕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방문하는 티룸을 운영하고 있다. 애프터눈 티 세트의 가격이 세계 최고로 비싸다.

독일 살면서 런던을 대여섯 번을 갔지만, 숨 쉬는 것마저도 비싸게 느껴지는 런던이었다. 초등 저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티룸을 가본들, 달콤하고 값비싼 것들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을 것이 뻔하기에 애프터눈 티를 알아보기만 하고 침만 삼켰다. 남편이 아이들을 돌봐준다면 혼자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시간을 쓰기에는 런던은 갈 곳이 많았다. 이제 막 국제 학교에서 영어가 자리 잡아가는 아이들이니, 런던은 영어를 피부로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였으니까. 서점, 뮤지컬, 영화 스튜디오만으로도 일정은 부족하기만 했다.

 런던 시내의 튜브, 지하철로 명소들을 갈 수 있는 위치의 호텔들은 하나 같이 1박에 30만 원, 연휴 때는 더한 가격도 많았다. 남편이 주재 기간 동안 호텔스닷컴 같은 예약 사이트에서 부지런히 모은 포인트 별이 10개가 되면 거기에 100유로, 10만 원을 보태서나 런던 숙박을 할 수 있었다. 클래리지 호텔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티룸은 고사하고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꼬르동 블루를 수료하면 인턴쉽 기회가 생긴다. 급여는 없다. 인턴쉽 기회가 생겨 영국을 떠나지 않아도 되면 그것으로 영국으로썬 인심을 쓴 셈이다. 꼬르동 블루 주방에만 있다가 5 스타 호텔 주방에 간 동생 눈이 동그래졌다고 한다.

주어진 일은 하루 종일 과일 깎는 일였다. 디저트에 들어가는 각종 고급 과일들을 깎고 또 깎다 보면 오는 점심시간이 꿀 같았다. 고객들용으로 만들었다 남은 여분의 디저트가 주방 막내들의 점심식사 후식이었다고 한다. 은장 둘러진 민트색 본차이나 접시에 놓여 있지 않다. 아무렇게나 트레이에 놓인 스콘, 타르트들을 먹으면서 얼마나 황홀했는지 언니는 모를 것이라 했다. 알 수 없다. 세계 1위의 티룸에서 제공되는 티푸드들이 쌓여있는 주방 뒤편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꿈이 티룸이라면 동생의 경쟁 대상은 패리스 힐튼 같은 상속녀들의 패밀리가 누리는 부의 원천인 호텔이다. 파리바게뜨도 아니고, 모텔이나 에어비엔비도 아닌 5성급 호텔과 경쟁하겠다는 소리다. 경영학과 나온 여자인 호박씨의 머릿속에 마케팅 원론 시간에 배운 포지셔닝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괜히 물어본 걸까? 다시 태어난다면, 그 어떤 속박도 제한도 없다면 티룸을 운영하고 싶다는 동생의 말에 숨이 막혔다. 감당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몇 분만에 후회를 했다. 고작해야 파티셰의 꿈을 다시 펼치고 싶다거나, 미금역에 디저트 카페 하나 열고 싶다 정도일 줄 알았다.


우리는 눈을 맞췄다. 눈물이 가득 찬 동생의 눈을 보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누구의 꿈이든 소중한 거야. 꿈은 자유자나. 너의 꿈을 존중해야 한다고."

경력단절녀라는 호박씨의 주제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겠다. 호박씨의 꿈 또한 소중히 여겨지고 있는 중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일에는 배 놔라 감 놔라 잘하는 것이 인간 아니겠는가!

동생의 훌쩍임을 여전했으나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꿈이라도 실컷 꿔보자고 했다.

" 너의 가게는 어떻게 생겼을 것 같아? 이름을 뭐라고 할까?"

" 흑흑흑... 모르겠어.... "

" 앞으로 찬찬히 생각해보자."


클래리지 호텔 쉬는 시간에 먹은 애플 스콘을 동생은 떠올렸다. 스콘인데 초록 사과가 들어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맛일까?

맛있는 스콘도 사실 먹어본 일이 없다.  독일에서 주재원으로 보낸 5년의 시간 동안 스콘을 찾기도 힘들었거니와 맛있는 스콘은 만나기도 힘들었다. 스콘은 사실 40년 전, KFC가 처음 안양 시내에 처음 생겼을 때 먹었던 갓 나온 비스킷이 최고였다. 오래 전임에도 불구하고  1회용 딸기잼을 알뜰하게 짜내어 묻혀가며 먹었던 뜨끈한 비스킷은 여전히 최고의 스콘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국 여왕님도 먹었다는 그린 애플 스콘에 대한 기억을 동생은 그려내고 있었다. 가망 없는 꿈, 티룸이란 단어에 얼떨떨하고 있는 나를 동생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꿈을 풀어내는 순간만큼은 상대를 살필 눈치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고 싶은 일을 그려낸다는 것은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일이다.

https://www.claridges.co.uk/




코로나에 점심을 먹지 않고, 단축 수업을 하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다가왔다. 나보다 더 눈이 벌건 동생에게 점심 챙겨 먹고 과외 가라는 말을 남기며 사람 많은 미금역 사거리를 걸었다.

여왕의 오후.

여왕이 즐기던 오후의 티타임 같은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공간이 그려졌다. 원래도 12시면 사람이 적은 신분당선은 코로나라 더 텅 비어있었다.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 여왕의 티타임, 여왕의 오후, 막 생각 나는 데로 끄적거려 본다."

" 응. 여왕의 오후. 좋아, 언니."


입으로 읊조려 본다. 여왕의 오후. 여왕의 오후.

주재원으로 독일에 다녀온 시간만큼 호박씨의 경력은 사라져 있었다. 이력서에는 마지막으로 사회생활을 한 것이 10년 전이였다. 파티시에의 꿈은 방구석에 처박아 둔 체, 영어 과외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는 동생은 비정규직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지 5년째이다. 스스로의 삶 속에서 주인이자 여왕으로 살고 있다고 하기엔 우리 둘 다둘다 사회적 존재감이 없는 중이다.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지하층을 향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우리가 여왕이 되는 삶, 오후의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올까?


여왕의 오후는 그날 엄마의 부엌에서 태어났다. 동생의 고양이가 여기저기 긁어둔 상처가 있는 20년짜리 원목 식탁은 3단 트레이가 놓인 감미로운 디저트 테이블로 바뀌었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분당의 아파트 주방은 민트색 벽지와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걸린 아르누보 스타일의 티룸으로 변신했다.

 세상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검은 백조를 발견하기 전까지 세상은 검은 백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경력단절녀와 비정규직이 꾸려나가는 티룸이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해도, 존재할 수는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이들만이라도 믿어 주리라. 적어도 우리 둘은 알고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여왕의 오후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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