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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l 01. 2022

판다 컵케잌으로 행운을 불러오는 파티시에

국제학교 유치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고슴도치가 되어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재 나가기 전부터 남편은 독일 출장, 터키 출장이 잦았다. 독일에 다녀오면, 남편의 트렁크에서는 유기농 감기 사탕, 하리보 젤리며 아요나 치약이 나왔다. 처음으로 극장에서 디즈니 만화 영화 미녀와 야수를 보면서 미국은 도대체 얼마나 좋은 나라이길래 이런 것을 만들어낼까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독일은 얼마나 멋진 나라이길래,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시작부터 졸아있었다. 


유치원 교장선생님은 하필이면 영국계였다. 곧곧한 포즈며 익숙지 않은 영국 악센트며 새침한 섬나라 사람 특유의 표정에 적응이 안됐다.

유치원 교문을 들어서면 보드가 한 개 서있다. 그날의 인물이다. 보드에는 전날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택한 사진 두세 장과 함께 사진 속 주인공에 대한 유쾌한 질문이 쓰여있다. 부모 손을 잡은 꼬마들도 학부모들도 혹시 보드의 주인공은 내가 아닐까 하는 기대에 지나침 없이 멈춰 선다. 말을 익히기 시작하는 미취학 아동들이다 보니 더듬더듬 문장을 읽으며 아침부터 부모를 뿌듯하게 해주기도 한다. 

보드는 Frankfurt International School에서는 빌보드보다 핫하다. 유치원 졸업 전에 우리 집 두 꼬마도 보드의 주인공이 되는 날이 올까? 알파벳도 모르고 입학한 두 녀석에게 희망은 없어 보인다. 당장 반 아이들과 소통은커녕 수업 따라가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그래도 꿈은 가줘봐야 하지 않겠는가? 허무맹랑하건, 말도 안 된 건 꿈꾸는 것이야 얼마든지 자유니까. 


동생의 첫 독일 방문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나의 재독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다. 나라 지키듯 약국을 지키시는 두 분에게 답답함을 느꼈고, 엄마는 불안한 마음에 언니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오라는 편지를 발목에 묶은 비둘기로 동생을 독일로 날려 보냈다. 

작은 아이 교실 바로 옆에 붙은 Kitchen을 노렸다. 아이들이 요리하기엔 최신 설비의 주방이다. 작업대는 아이들 높이에, 포크와 컵, 접시도 한 반 아이들 숫자만큼 구비되어있다. 

" 얘들 데리고 베이킹 수업할 수 있을까? 네가 왔으니까... 혼자서는 자신 없어." 

반의 다른 학부모 한 명만 베이킹 수업을 거들어 주면 좋겠지만, 부탁할 만큼의 숫기라고는 없는 호박씨다. 게다가 친해지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동생은 흔쾌히 Yes.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은 베이킹을 붙잡고 있었다. 영국서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가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이 매장, 저 매장 취업했다 그만 두길 반복하고 있긴 했지만, 직업은 파티시에였다. 


작은 아이 반 담임인 Ms. Koppe에게 동생을 소개하고, 주방 시간에 맞춰서 아이들과 컵케잌 굽기 수업을 하겠다고 했다. 미스 코페는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라 했다. 

우린 10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판다 컵케잌을 만들었다. 판다 얼굴이 될 초콜릿 케이크는 미리 구워갔다. 주어진 시간은 30분이였고,  아이들은 판다 얼굴만 만드는데도 한나절일 것이 뻔하다. 아침에 나의  부엌에서 일찌감치 구워 식힌 주먹만 한 컵케잌 10개와 스프링클을 들고 유치원으로 출동했다. 판다의 귀가 될 커피콩 20개, 판다의 코와 입을 그릴 Edeka 슈퍼의 화이트 초코펜 그리고 설탕으로 만들어진 판다 눈알.


아이들에게 동생이 시범을 보여준다. 

만 4세들에게 동생은 마법사다. 동생의 손에서 판다 한 마리가 태어난다. 진행하는 동생 옆에서 아이들의 성공을 거들었다. 10개의 판다가 완성되자 시간을 정확히 맞춰서 Assistant인 Ms. Vogelsing 선생님이 아이들을 줄 세우러 오셨다. 

아이들의 간식시간이다. 오늘은 간식을 싸올 필요가 없다고 반 아이들 부모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두었다. 파티시에와 만든 판다 컵케잌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떠나 주방은 어지러웠지만, 독일치곤 드물게 맑은 날이라 치우기 힘든 줄 몰랐다. 

밤새 동생은 남편과 와인을 마셨다. 본전 뺀다며 둘이 각 한 병씩 마셨고, 난 옆에서 Radler Frei 라임맛 알코올 프리를 실컷 마셨다. 와인 한 병을 따면 남편이 다 못 마신다며 자꾸 마시라고 독촉했는데 동생이 와서 남편을 거들어 주니 Frei 그야말로 자유였다. 


작은 아이 손을 잡고 등교한 학교 입구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있다. 보드의 주인공이 내 아이라니, 흥분하면 유치한 건데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보드에서 3시 방향쯤에 기대어 레이싱 걸처럼 서있고 싶었다. 아는 한국 엄마라도 이 시간에 등교하면 좋겠는데, 이 순간 둘러보니 아는 이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어제 주방에서 들고 나간 간식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찍은 아이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이다. 교장선생님의 문장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한국 아이들이 적긴 하지만, 교장선생님과 소통이 많다면 보드에 한 번쯤은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금발 아이들만 붙어있던 보드판 속 검은 머리의 딸을 보니, 그제야 이곳에서 받아들여졌구나 싶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존재감 없이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의 시작은 구름 사이 드물게 비치던 독일 햇살처럼 희소하지만 빛났다. 

졸아서 다니던 국제학교 보드의 주인공이 되던 날, 작은 아이가 보드 앞을 지나다니며 하루 종일 선생님께 조잘거렸을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나예요 라고. 동생이 파티시에로 주방의 주인공이 되면 행운이 오는 것 같다. 솔솔 오븐에서 달큰한 향기가 나듯 우릴 찾아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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