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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l 03. 2022

파랑, 르 꼬르동 블루






"꼬르동 블루는 일머리는 안 가르쳐 주나 봐."

S대 종교학과, 르 꼬르동 블루 런던 졸업도 동료들의 쑥덕거림을 막을 수는 없다. 재수해서 대학을 가고, 편입을 하고, 영국 요리 학교로 유학 갈 경비를 마련하는 데에 시간이 흘러갔다.  한국으로 돌아와 주변을 둘러보니 동생의 나이는 동료들보다 많게는 10살까지 차이가 났다. 고교 졸업 후, 전문대나 직업학교를 나와서 몇 년씩 제빵실에서 땀 흘린 이들이었다. 




"만두 구워온 꼬라지 좀 봐."

그 얘의 엄마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국제학교 학생으로 태어난 듯이 영어를 구사하던 그 얘. 그 얘의 엄마는 꿰뚫듯이 사람을 스크린 했다. 제한적인 사람과 인사했다. 

 월드 페스티벌의 한국 부스는 한국 엄마들의 발룬티어, 자원봉사로 음식이 채워진다. 호박씨는 군만두 담당이었다. 오전 10시까지 한국 부스에 만두 4 봉지, 50개가량을 구워가야 했다. 충분히 식혀서 넣었어야 했나 보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만두들은 김으로 눅눅해 쳐져 있었다. 플라스틱 통에 담아온 만두들은 부스에서 다시 기름에 튀겨져 각국 사람들에게 판매된다. 그러니, 꼬라지가 그 모양이어도 사실 판매에 문제는 없다. 그러니 그리 큰 목소리로 만두의 형태를 비판해야만 하진 않았을 것만 같다. 


 월드 페스티벌에서 제일 큰 부스는 독일과 일본 부스이지만, 먹을만하기로는 한국 부스를 꼽을 수 있겠다. 일본 부스의 초밥은 일본 엄마들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 매년 프랑크푸르트 시내의 유명 초밥집에서 주문한다. 독일 부스는 맥주와 프레첼을 판다. 맥주 펌프에서 스위치를 누르는 손맛 정도가 더해졌으니, 한국 음식 하고는 정성의 정도가 다르다. 

한국 부스는 일일이 손으로 한다. 냉동만두를 굽고, 불고기를 끓이고, 밥을 한다. 한국 엄마들이 집에서 나눠 해오면, 부스에서 다시 덥혀 따뜻해서 제공한다. 우리 얘들 좀 잘 봐주라, 한국 좀 사랑해주라 하는 마음의 목소리가 애살스럽게 묻어난다. 음식에서 느껴진다. 


그 엄마도 만두 담당이었을까? 

덥혀지기 전 한쪽에 쌓인 음식들은 누군가가 몇 시간 적 부엌에서 만들어온 음식이다.  음식을 대하는 마음은 어떤 경우에도 꼬라지라는 단어를 붙이지는 말아야 한다.  못생긴 그 만두는 어느 부모의 솜씨이다. 그녀가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 국제학교에서 지내는 부모의 마음 그 한 조각이라도 추측하고 지냈을 터이다. 그녀도 누군가의 자녀이고 누군가의 부모이니까.








동생은 새벽 5시에 일어나 5개월간 출근을 했다. 모여서 쑥덕거리고, 타박해도 가만 듣고 있었다고 했다. 꼬르동 블루 런던의 수료 기간과 클래리지 호텔 주방에서의 인턴 기간을 다 합쳐도, 그들의 경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들의 손에 익을 대로 익은 제빵 실력에서 본인은 한참 모자라니, 혼나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동생을 향해서 소시지빵이 날아왔다. 

"그렇게 가르쳐 줘도 몰라요?" 

".. 그렇다고 던지십니까?"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울었단다.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빵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동생이 만들었던 그 소시지 빵에는 동생의 마음과 눈물이 묻어났을 테지. 능숙하게 소시지빵을 만들어내고, 동생을 타박하던 동료에게도 시작이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음식을 다루는 사람으로, 제빵사로 불리는 그녀가 던진 소시지빵은 음식이 아니다. 그녀는 빵을 만들 자격이 없다. 소시지빵을 던졌던 10년 전의 그녀는 아직도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 


르 꼬르동 블루의 심벌은 로열 블루, 푸른색이다. 심벌보다 더 파란 꿈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온 동생의 첫 공동체는 한 프랜차이즈 업체의 제빵 작업장이었다. 

꿈이 있으면 버텨진다. 내일이 있으면 살아진다.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 오늘을 산다. 내 글이 내일은 더 많은 이가 읽을 만큼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에 오늘도 키보드 위를 달리는 손가락처럼 말이다. 

만두 꼬락서니를 운운하던 그녀는 그 해가 독일에서의 마지막 해였다. 주재원은 그래 봤자 시한부였다. 좁은 주재원 사회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본 들, 한국으로 돌아갈 운명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 국제학교도 주재원 사회도 버틸만하다. 즐길 수 있다. 


소시지빵 이야기를 듣다가 동생에게 물었다. 

" 그렇게 힘들 때, 왜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어? 왜 난 너의 고생을 몰랐어? " 

" 언니 넌, 그때 금천구 15평 아파트에서 독박 육아하고 있었잖아." 

그래. 그랬구나. 미안하다. 

1년만 버티면, 2년만 버티면, 어느 날 파티시에가 되어있을 거라고 꿈을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우리에겐 단 한 사람 , 단 한 조각의 꿈이면 충분하다. 때론 단 한 권의 책이기도 하다.  시리게 파란색의 미래를 보여주는 하나만 있다면, 우린 오늘을 살아낸다. 

지금 여왕의 오후 앞에 선 우리는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 가득 푸른색이 눈 안에 가득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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