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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생일

-1일도 안 겪었다.

by 호박씨


2014년 12월 9일 컨테이너 이사를 하던 날은 하필이면 서른 여섯째 내 생일이었다. 하루 종일 나는 내 생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침 7시에 컨테이너 작업을 시작한다고 하셨지만 설마 7시에 딱 맞춰 오시겠어 싶었다. 정확히 7시에 우리 집 벨이 울렸다.

그때 우리의 상태는 이러했다.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 두 어린이는 잠옷 바람이었다. 식탁에는 애들 아침으로 깎아둔 사과가 있었는데, 사과를 깎은 칼과 사과를 담아둔 접시는 보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들은 잠옷바람인데 이 잠옷은 보내야 하는지 아닌지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 이런 식이였다. 무엇을 싸 보내야 하는 거지? 무엇을 싸지 말아야 하는 거지?


12월 9일에 컨테이너를 싸 보내고 우리는 출국이 12월 30일이다. 싸 보낸 컨테이너는 3개월 후 함부르크에 도착하고 컨테이너를 실은 차는 우리가 지낼 프랑크푸르트에 육상 편으로 열흘 정도 걸려 도착할 예정이다. 우리 가족은 독일서 짐 없이 2달가량을 또 지낼 참이었다. 당최 무엇을 컨테이너에 싸야 하고 무엇은 싸지 말고 이민 가방에 넣어가야 한단 말인가.

남편은 전날까지도 축하주를 사고, 인사를 나누니라 먹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한 달쯤 먹고 있는 상태였다. 보리밭만 지나가도 얼굴이 빨개지는 우리 두 사람은 연애할 때도 둘이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했다. 회식 이 있는 날은 집에 겨우겨우 도착한 그가 안쓰러웠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술이 안 깬 그의 벌건 눈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난 도대체 이 컨테이너 작업을 무사히 끝낼 수 있는 걸까? 이삿짐 옮기시는 인부분들이 하실 법한 걱정을 나는 부엌 구석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부랴부랴 아이들을 어린이집을 보냈다. 그들이 있음으로써 조금이라도 신경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심산이었다. 작은 애는 행여라도 자기가 들고 가야 하는 것을 싸 보낼까 싶어 이럭저럭 자꾸 묻는다.

" 엄마, 겨울왕국 색칠 공부 보내면 안 돼. 엄마, 겨울왕국 드레스 입을 거야."

드레스 아니고 잠옷이야, 딸아.

렛잇고가 전 지구에서 울려 퍼지던 때였다. 독일 가면 없을까 봐 샀던 딸의 색연필 12색도 겨울왕국이었다. 난 그렇게 뭘 몰랐다. 파베르 카스텔의 나라 독일에 색연필이 없을까봐 그걸 코스트코 가서 사 가지고 왔더랬으니 말이다.


이미 어린이 집을 갔다 온 사이에 순식간에 짐들은 박스에 쌓여서 나간다. 해외 이사는 국내 이사보다 훨씬 꼼꼼하다. 적도를 지나 지구 반대편에 잘 도착해야하니까 말이다. 일단, 우리에게 배정된 컨테이너에 일단 다 넣을 수 있는지가 문제다. 박스 포장은 다 했는데 컨테이너에 안 들어간다면 그건 그냥 버려야 한다. 못 가져간다. 그래서 일단은 가구, 큰 짐부터 들어가고 그다음 자질 구레하고도 수없이 많은 내 삶의 짐들이 박스로 포장되어 테트리스처럼 컨테이너를 채워 넣게 된다.

큰 짐이라곤 퀸사이즈의 침대와 2인용 식탁이 다였다. 붙박이장은 거금 10만 원을 들여서 수거 처분되기로 되어있었다. 아무도 10자짜리,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내가 너무나 애정 하여 고른 이 붙박이장은 원하지 않았다. 아니 나는 이 장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구할 시간이 없었다. 발령은 10월 말, 컨테이너는 12월 초였으니 만 한 달 정도의 시간 안에 나는 많은 것들을 정리해야 했고, 붙박이장을 벼룩시장이나 카페에 올릴 시간은 전혀 없었다.

리틀 타익스 표 미끄럼과 아기자동차는 이웃집 언니J의 친구네 기부했다. 이사 전전날 큰 차를 가지고 방문하셨는데, 과자를 한 아름 주고 가셨다. 처치곤란 그것들을 가지고 가주어서 나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과자까지 갔고 오시다니 과자 한아름에 감동의 도가니였다. 나는 미끄럼과 버스가 없는 작은 방이 텅 빈 듯 섭섭했는데 아이들은 과자에 좋아라 했다. 7세와 5세에게는 추억이란 개념은 없는 듯하다. 재미있게 놀만큼 놀았음 그것으로 된 거다. 아이들이 옳긴 하다.


주방이 제일 문제였다. 이사 담당자님이 3주쯤 전에 오셔서 견적을 보시고는 이미 먹거리를 싸 보내는 방법에 대한 설명서를 주고 가셨다. 업소용 식용유 통 사이즈의 알루미늄 통 안에 고추장, 된장을 넣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공공연히 허락되었었는데 내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먹을 것은 단 한 개도 한국으로 컨테이너로는 보낼 수 없다고 하셨다. 운이 좋았던 걸까? 나는 4년어치 된장, 고추장, 간장을 싸갔고, 그것은 컨테이너 인부분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많은 양이였다. 처음 약속한 4년 동안 우리 가족은 그것을 다 먹었고 연장된 1년 동안에는 한국에서 오는 식구들 편에 된장을 받았다. 이만하면 된장 집착자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살림도 솔직히 자신이 없던 주부 7년 차였다. 어머니가 손수 하신 그 장들이 있으면 독일살이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잘 못하는 요리를 남의 나라 가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나의 이런 너무 이른 걱정은 기우였다. 남의 나라 가니 내가 밥 안 하면 한식은 구경하기 힘들었고, 손님상을 계속 차리다 보니 후에 내 음식 솜씨는 반 강제적으로 성장했으니까 말이다. 정말 이르기도 너무 이른 걱정이었다. 인부 아저씨들은 나의 이른 걱정 어린, 그 많은 장을 옮기시니라 고생하셨다.


냉장고는 이틀 전에 비워 문을 열어둔 상태였다. 주방에는 냉장고에는 들어가지 못한 음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많이 버렸는데도 말이다. 사실 냉장고를 비우던 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일하시는 엄마에게 난 도움을 청하지 않는 큰딸이다. 이틀 전 저녁 7시쯤 퇴근하시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 잘 비워가? "

" 엄마, 지금 좀 와줄 수 있어? "

" 응? 지금? 왜? "

" 엉엉엉."

냉장고에 있는 물건들을 싹 다 꺼내서 버릴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자니 , 이 또한 혼자, 눈물이 났다. 엉엉 울고 있던 차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엄마는 1시간이 안돼서 출동을 하셨고, 모든 것을 담아서 버리셨다. 거의 모든 것을. 그리고 엄마가 장 보려고 했었던 것들이라면서 한 장바구니 정도를 본인 집으로 챙겨가셨다. 11 시에가 돼서야 내 냉장고로부터 퇴근하실 수 있었다.

" 엄마, 어떻게 이렇게 금방 왔어? "

좀 진정이 된 나는 신기해서 엄마에게 물었다.

"야, 네가 오라고 하는 거면 진짜 급한 거잖아. 네가 웬만해서 오라고 하니?"

고마워, 엄마. 웬만하면 정말 안 부르려고 했다. 난 그런 딸이다. 그러고만 싶었다. 첫 해외 이사이면서도 일하는 우리 엄마에게 도움 한번 요청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께 장은 부탁했지만, 엄마에겐 딱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부탁을 하길 시작하면 봇물처럼 내 두려움이 사정없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마음이 담긴 나의 주방은 30분도 안돼서 깨끗해졌다. 깨끗해진 주방을 보니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때쯤 온 전화. 남편 친구의 와이프였다. 남편 친구는 구매 대행 사업을 하기 위해 독일에 얼마 전에 나가 있던 차였다. 남편의 대학 동창인 그가 나가 있어서 남편은 정말 좋아라 했다.

바야흐로 구매대행의 전성기였다. 큰아이 기저귀 발진이 심해 일본 기저귀 " 군"만 쓰다가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방사능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비싸지만 북유럽 기저귀를 구매대행을 해서 쓰기 시작했다. 비싸도 너무 비쌌지만, 친정엄마는 엄마도 없는 아들이 손주로 생겨 전재산을 털어서 큰아이 기저귀를 사주실 판이었다. 나는 열심히 구매대행을 했고 말이다. 그 독일로 가는구나 싶어 신나고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없다면 거짓말이다.

남편 친구 와이프인 S는 우리 컨테이너에 박스 3개 정도만 실어 달라고 부탁을 하러 왔다. 나름 우쭐했다. 해외 이사 비용은 남편의 회사가 부담하는 건데 내가 우쭐해진 이유는 고맙다고 연신 이야기하는 S의 싹싹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준비의 벅참에도 주재원으로 유럽 발령 나간다고 하니 부럽다는 동네 친구들의 시선 때문이였을까? 박스 3개는 충분히 자리가 된다고 전화에 답해주었고 그녀는 1시간 정도 후 박스를 싣고 이사 마무리 작업 중인 우리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온 딸기 생크림 케이크.

" 언니, 저희 박스 실어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

언제 이삿날이 내 생일이라고 그녀에게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내 성격상 그녀에게 말했을 리도 없고, 챙겨 달라고 할 만큼 우리는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서로의 남편들이 친구이긴 했지만 따로 만난 적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해외이사를 준비하며, 그녀 또한 곧 맞을 독일 생활을 준비하며 우리는 좀 서먹하지만 또 꼭 필요한 대화를 나눴었더랬다. 싹싹한 S는 언니라고 부르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되돌이켜 보면 내가 그녀에게 해준 조언들은 조언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들이였다. 해외 살이가 처음인 것은 그녀나 나나 다를 바가 없으니 나도 알아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말이다.

20여년전에 대학생인 내가 배낭여행으로 30일 갔다온 유럽은 ,가족과 함께 주재원으로 4년을 살러 나가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일이였다. S는 주재원 생활을 했던 친언니도 있었고, 해외에서 공부하는 조카도 있었으니 알아도 그녀가 더 많이 알았을 것인데, 나의 자만심과 우쭐함에 내가 했던 조언들은 지금도 낯이 뜨겁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함께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딸기를 먹었다. 텅 빈 집에서 한 상자에 5천 원이나 하는 겨울딸기를 먹으며 그날의 그 묘한 우리 집을 즐기고 있었다. 생일 기념 저녁 외식 따위는 꿈도 못 꾸고 너른 거실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아이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텅 빈 집에 메아리로 울렸다. 그런 겨울딸기는 그 후 5년 동안은 먹지 못할 줄도 모르고 그날은 마냥 좋았다. 왠지 생일 같이 달콤한 날들만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주재원 생활 1일도 겪지 않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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