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이란 단어는 오래전부터 내 곁에 있었다.#1
- 오스트리아도 독일어 씁니다.
독일 주재가 내 삶에 들어온 것은 2014년 10월 발령이 나던 그날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재원이란 단어는 나의 고2부터 내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긴 오스트리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G는 특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의 학교는 여름방학 따윈 꿈도 못 꾸는 고교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였으니, 교실 천장에 달린 선풍기 네댓 대에 의지해서 끓는 여름에도 어김없이 보충 수업을 들으며 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G는 내 바로 앞자리였는데 엎드려 잠을 자곤 했다. 수업 시간이건,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이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잤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특례 학원을 가니라 정규 수업시간 6교시가 끝나면 하교를 하곤 했는데, 학교 앞에는 특례 학원에서 재수를 하는 남자 친구가 그녀를 데리러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G가 일어나 있는 시간은 독일어 시간이었다. 제2외국어 독일어를 선택한 여학생이 많지 않은 탓에 문과, 제2외국어, 여학생이라는 세 가지 공통분모가 결국 그녀와 나를 같은 반으로 묶은 셈이었다. 수능에도 안 나오는 독일어 담당 노총각 선생님의 강의에 누구도 귀 기울지 않았다. 독일어 선생님과 소통하는 이가 딱 한 명 있었으니 G였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에서 지내다 왔으니 그녀의 독일어는 유창했고, 물 만난 고기처럼 G는 혼자 과외하듯 독일어 시간을 즐겼다.
책상에 엎드려 자면 그녀 바로 뒷자리에 앉은 내 눈에는 G의 얇고 하얀 여름 교복 속으로 브라 뒤태가 선명히 보인다. 여러모로 맘에 안 드는 애라고 생각했다. 칠칠하게 저렇게 속옷 티 나는 줄도 모르고 엎드려 잘까라며 그녀를 팔자 좋게 노는 애라 여겼다. 공부 아니 고생이라곤 1도 하지 않는 그녀. 잘 거면 집에 가서 편하게 자지 왜 여기서 자는 걸까? 꼴 보기 싫게 말이다.
그런데 G는 자꾸 나를 따랐다.
" 점심 같이 먹을래? "
" 나? "
왜 였을까? 단짝 친구 없이 공부만 하던 나의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였을 것 같다. G가 와서 먹든 말든 난 크게 상관없었으니까 말이다. 고1에 전학 와 시간이 지나도 늘 첫날 같은 낯섦을 겪던 나였으니 내가 그녀를 이해해줄 것이란 일말의 촉 같은 것이 G에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그냥 바로 뒷자리여서 별 의미 없이 내게 말을 건네었거나.
수능을 보자마자 G가 부탁을 했다.
" 내 동생 과외 좀 해줘."
G의 동생은 이제 고1인데 G 와는 다르게 특례 입학 전형을 치를 수는 없었다. G의 엄마가 걱정이 크시다며 이제 막 수능 시험을 치르고 대입전형이 끝나지도 않은 나에게 G의 동생을 맡기셨다. 사실 G가' 네가 내 친구 중에 공부 제일 잘하잖아.' 하며 나를 그녀 엄마에게 추천한 것이었었다.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보충시간 엎드려 자는 그녀 뒤에서 늘 부러움 섞인 눈으로 그녀를 흘기던 나인데, 야간 자율학습 한번 안 하고도 인 서울 S대를 가는 그녀를 보며 넌 공짜 인생이구나 하며 비난했었던 나인데 그녀는 내 동생을 너에게 맡긴다고 한다.
주재원 생활을 했었다고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한 가지다.
" 좋으셨겠다."
그냥 웃으며 " 네" 하면 되는데 , 나는 말보단 생각이 더 멀리 나아간다. 솔직하게 말하면 좋지만은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대화 상대자가 원하는 답은 이것이 아닐 것을 뻔히 안다. 그래서 웃으며 " 네" 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 아.... 네..." 하고 뜸을 들이다. 생각이란 것은 혼자서 좀 있다 하고 타인과의 대화에서는 적당히 얼버무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
독일, 오스트리아의 여름은 지상 천국이다. 바삭바삭 건기의 여름은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맛 보이고 싶은 그런 탐나는 계절이다. G에게 한국의 후텁 지근한 여름, 자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던 그 시간들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고2에 한국에 들어와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수업을 6시간씩 듣고 앉아 있어야 했으니 한 자릿수 중간고사 수학 성적표를 받아 드는 G는 전혀 괜찮지 않았을 테지. 한국서 10년씩 교육받고 있는 한국 학생 어느 누구에게도 만만하지 않은 고2였다.
내 아이가 국제 학교에 다녔었다 보니 그녀가 느꼈을 교육 문화의 차이는 이제야 내게 피부로 느껴진다. 참여와 발표, 실행으로 구성된 국제 학교 교육 프로그램을 듣다, 여름 보충학습까지 자리 지키고 있어야 하는 환경에 구겨 넣어져야 했던 G의 입장을 18살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해 줄 생각도 없었다. 나만, 내가 제일 힘들다 생각했다. 그녀의 엎드린 등만으로도 이 상황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25년이 지난 지금, G의 입장이 되고 나니 이제야 상황이 달라 보인다. 5년 동안 한국은 한 번도 오지 않았으니, 독일인이 되어 살겠다며 집중했던 시간만큼 한국은 몹시 낯설다. 여기가 어딘가 싶을 만큼 정신을 못 차리겠다. 남편은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에 먼저 팀장 자리를 꿰찬 동기나 후배들을 보며 박탈감을 느낀다. 빈 시간만큼의 사내 인맥을 만들어보겠다고, 다시 잘해보겠다고 그는 발버둥 치고 있다.
겨우 중학교 1학년, 초등 고학년인데도 지엄한 한국 공교육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걱정이 산더미다. 친구는 사귈 수 있을까, 서툰 한국말에 오해를 사진 않을까 전전 긍긍이다. 누구 한 명이라도 내 아이에게 말 걸어주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
G에게 품었던 내 마음, 그녀는 몰랐겠지만 이제야 나는 부끄럽다. 어느 인생이건 한 장면만을 보며 평가하며, 과정을 살펴보지 않았던 어렸지만 어리지 않았던 내가 부끄럽다. 한국에 들어와 누군가가 나에게 손 내밀어 준다면 그건 G에게 흔쾌히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던 내 대답이 시간을 거슬러온 인과응보의 값이려니 위로해본다. 돌아보니 부끄럽기만 한 일 투성이라면 돌아보기가 거북해지니 말이다.
누군가도 나에게 좋으셨겠어요 라는 말 대신 주재원 생활은 어떤가요라고 차분히 물어봐주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손내밈은 이런 정도다. 타임머신을 타고 18살로 돌아간다면 무기력함에 엎드려 자던 G의 등을 토닥이며 깨워 물을 테다.
" 오스트리아 생활 어땠어? 지금은 어때? "
시샘 어린 시선은 거두고, 다정히 말 걸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