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원이란 단어는 오래전부터 내 곁에 있었다. #2
- 주재원 아니어서 다행이야
남편은 부부 싸움하고 나면 잘 잔다. 고래고래 코를 골면서 12시간 넘게도 잔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는 잠으로 스트레스를 푼다는 사실을 말이다. 잠이 아주아주 많은 사람이며, 잠을 자야 피로가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도 살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남자 친구가 남편이 되고 나니 그제야가 콩깍지가 벗겨졌고, 새로운 남자가 나랑 한집에 살고 있구나 라는 현실을 깨닫는 데는 몇 달이 걸렸다. 아니 한 1년은 걸린 듯하다. 또는 지금도 나는 콩깍지의 마법에서 벗어나고 있는 한 중간 인지도 모르겠다.
큰 아이는 미라클 모닝 스타일 아기여서 (시대를 앞서가던 그 아기는 이제 중1이 되었다.) 새벽 6시만 되면 아주 상쾌한 기분을 장착해 기상했다. ' 엄마, 안녕'의 표정으로 똘망하니 나를 보며 잠에 취해 눈 못 뜨는 내 옆에서 잘 놀았다. 아이가 일어났으니 모유수유도 해야 하고 이유식도 줘야 하고 돌아다니면서 뭐 만지지는 않나 돌봐줘야 하니 새벽부터 엄마라는 업무시간에 돌입하는 날이 매일이었는데 남편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맹세코 단 한 번도 말이다.
작은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나도 포기란 것을 했고, 그 조그만 아기도 사람이라고 큰 아이가 일어나서 잠귀가 밝은 작은 애가 깨어나 두 아기가 깨어 있으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 나는 살짝 다시 잠이 드는 아침들이었다. 어른이 하나고, 아이가 둘이니 주말에는 이젠 제발 좀 일찍 일어 나주라고 말해보아도 1시나 돼야 우리 셋이 있는 거실에 나타나는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한밤중에 TV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는 TV를 켜고 멍하니 TV를 향해 앉아 있었다. 초점 없는 눈에 미간을 찌푸리고 열없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는 없고 , 그의 몸뚱어리만 소파에 걸쳐져 있구나 싶어 보였다. 불 꺼진 거실에 유령처럼 거실에 있는 그를 보니 자다 깬 나는 덜컥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인 걸까? 잠보도 이런 잠보가 없다 싶을 정도의 남편인데 왜 안 자고 저런 표정으로 앉아있을까 싶었다.
한 달 정도 지나고 나서야 남편이 입을 열었다. 상황도 감정도 혼자서 다 정리를 하고 나서야 남편은 나에게 말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 독일 주재원 발표가 났어. 나는 안됐어."
이제야 말하고 걷는 아기 한 명과, 이제 말하기만 가능한 다른 아기 한 명과 유럽이라니. 주재원 안돼서 잘됐다.
금요일 밤이면 친정집으로 아기들 짐을 다 싸가지고 친정엄마에게 빨대를 꽂으러 가는 나였다. 토요일 1시나 돼야 일어나는 그를 견디기고 싫었고, 아기들을 돌보면서 아침, 점심 두 끼를 해내기도 싫었다. 점심은 어쩌나 하는 찰나에 부스스 일어난 그가 내 눈치를 보며 나가서 뭐 먹을까 해, 애들 데리고 나가 하는 외식은 고역이라 늘 내키지 않았다. 토요일 새벽같이 깬 큰애가 이뻐서 나랑 작은애가 깰까 봐 조용조용 방에서 데리고 나가 친정 거실서 실컷 물고 빨고 예뻐라 할 시간을 갖으셨던 엄마였으니, 내가 혹 세 개를 달고 친정에 오는 것을 즐기실 거야 하고 나를 위로하며 죄책감을 달랬었다. 일요일 점심까지 다 해결하고 일주일치 장 볼거리까지 바리바리 싸서 일요일 밤에나 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런 우리 엄마가 없는 독일은 절대 나갈 수 없다. 유럽 발령은 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남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유럽 주재는 남편에겐 유의미하고도 유의미한, 그의 커리어의 큰 시발점이었다.
해외 영업 부서의 많은 선배들은 해외법인의 주재원으로 커리어의 첫 단추를 끼우고, 법인장으로 다시 해외 생활을 하며, 법인장으로의 역량을 발휘해 회사 내 입지를 다짐으로써 임원이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대기업 해외영업부서 대리의 승진 과정에 대한 이런 디테일을 듣고 나서야 한 달 전 그의 TV 앞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이해는 되지만 안나가게 되어 다행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임 없었다. 그의 커리어는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고 나는 내 코가 석자이며, 남편은 의욕 없는 양육자라고만 여겼다. 나는 육아 하나밖에 모르는, 육아가 세상 전부인 단순한 인간이었다.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으나 해외서 독박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익히 나에게 겁을 준 이도 있었다. 대학동창 H였다. H는 남편의 독일 주재원 발령으로 그 당시의 1년 전쯤에 독일로 나가 있었다. 그녀는 직장을 다니지 않는 그 주재 기간에 둘째를 나아야 한다며 바쁜 해외 이사 준비 기간에 아기 용품을 바리바리 챙겨서 나갔다. 잠시도 허투루 시간을 보내진 않겠다는 워킹맘답게 똑 부러진 그녀였다. 계획대로 독일에서 둘째를 낳은 H는 밤 12시가 되면 나의 해외 육아 친구가 되어주었다. 한국시간으로 12시면 독일 시간으로 오후 4시 정도이다. 출장과 야근으로 얼굴도 보지 못하는 남편에, 학원 버스 없이 라이드 해야 하는 큰애 양육이며, 누구 하나 거둬줄 이 없는 작은아이 독박 육아까지 그녀는 말 그대로 슈퍼맘이었다.
혹시 우리도 발령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H는 본인의 독일 라이프 고생 담을 모두 쏟아냈다. H의 이야기에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H는 전화상으로는 그런 나의 마음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에 하소연이란 하소연은 다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H도 산후 우울증에 스산하고 어두운 유럽 날씨까지 고생이 많았었나 보다. 그럼에도 당시의 나는 그녀가 주재원의 힘든 생활 이야기는 그만 했으면 싶었다. 나나 되니까 이 삶을 감당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고 너 감당할 수 있겠니 라고 챌린지로 들렸다. H는 주재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10년 넘게 중동과 유럽 생활을 했던 이였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그녀보다 영어도 못하고, 해외 경험도 없으며, 육아도 허덕거려 친정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중인데.... 그녀와 통화를 할수록 나는 작아지고 있었다.
그때에 우리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을 했었나 보다. 긴긴밤의 그 통화들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지지가 아니라 들어줄 사람을 구하는 넋두리였을 뿐이었다. 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쓰임새가 전혀 없는 걱정들이었었다.
사원급은 흔히 4년 정도의 주재 기간을 갖는다. 실적에 따라 3년 만에 소환되기도 5년으로 연장되기도 하지만 평균적으로 4년이다. 유럽 주재원 자리는 4년이 흘러야 다음 발령이 나는 일이 되었고 나는 주재원이란 단어를 잊었다. 육아에 파묻혀, 결혼 생활에 파묻혀 어떻게 하면 남편과 잘 지낼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잘 지낼까를 고민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다음날이 수술인 큰 아이와 함께 아산 병원에서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