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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Mar 13. 2023

학폭의 고수를 만나면

카페 창업의 장점은 지인들과의 만남의 장소가 된다는 점이다. 이 장점은 종이 한 장차이로 단점이 될 수 있다.

만나고 싶지 않은데 찾아올 수 있다.

 업의 종을 바꾼다고 해서, 생각의 패턴을 바꿨다고 해서 인연들, 가족이나 친구가 당신의 변화를 눈치채긴 쉽지 않다. 소비자는 그만, 생산자로 살겠다고 나섰을 때에는 여러 계기가 있었을 텐데, 오래 보아온 지인들 중 그런  나의 심리적 결기를 가져온 변화를 읽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변화에 완벽하게 적응한 이들은 아이들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시간은 걸렸지만  말이다. 아이들의 생활이 궁금하면 눈치를 보면서 묻곤 했는데, 요샌 카페 고객이나 매출등 여왕의 오후와 관련된 이슈로 말문을 튼다. 상담받는 척하면서 그들의 상태를 더듬어본다.

애초에 그들에겐 내게 장사에 관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내공이 없지만, 그들이 잘하는 것은 귀 기울여주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보며 대화의 기술을 배운다. 타인을 위해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을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아이들은 그저 들어준다. 들어줄 준비를 하고 있는 기운을 느끼면 용기가 난다. 

아이들에게 변화는 스토리로 전달되나 보다. 장면별로 끊기는 활동 사진처럼 엄마의 변화가 인식된다. 나란히 눈을 맞추고 저녁식탁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 모든 것이 별일 아니게 된다. 마법 같은 대화의 기술을 그들은 내게 손수 보여준다. 


그녀가 광교 가까이 사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자주 올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한국 학교의 한국 애들이란 애들은 다 괴롭히고 다녔던 그녀의 아들은 긴 독일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와서도 국제학교로 입학했다. 흔히 국내의 국제학교로 입학하는 아이들을 보면 높은 학비를 감당할 부모의 재력을 부러워하곤 했지만, 그녀만은 예외였다. 초등 고학년인 그녀의 아들을 일반 학교에 넣었을 때의 뒷일을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겠지. 

" 우리 얘는 안 그랬다는데?"

그녀의 변명은 한결같았다. 사건이 터지면 조용히 있기가 일쑤다. 상대 엄마가 전화를 하며 그녀의 반응은 일관되게 ' 오해가 있다.'였다. 우리 아이는 그럴 정도의 아이가 아니라 했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 그녀가 나의 공간을 찾아와 앉아있다. 초대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엄연히 초대받았다 생각하는지 얼른 마무리하고 갈 생각은 일도 없고, 내가 근무하는 시간은 언제이며 본인은 얼마나 규칙적으로 카페를 방문할 수 있는지 시간을 맞춘다. 과거의 나는 이 사람에게 많이 맞춰줬구나 싶다. 주재원이라는 사회가 좁디좁아 웬만하면 서로 얼굴 붉히고 인사 안 할 일 없이 살려고 한다. 그 사회의 성격상 여럿이 그녀를 많이 봐주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방임이었나 보다. 방임의 결과로 뻔뻔하게 여왕의 오후에 앉아 그녀의 아이가 괴롭혔던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입에 올린다. 

" 걔는 내가 한국 와서 물어봤는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더라."

" 걔 엄마는 나쁜 년이더라고.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막 대하는지."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누가 보면 그녀의 아이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인 것만 같다. 몇 년도에 일어난 일인지, 아이들은 몇 학년이었는지 그 아이 아빠가 어느 회사 소속이었는지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그녀는 억울함이 묻은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한다. 


오늘까지 만이다 싶다. 다짜고짜 찾아온 그녀가 나의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진 않을 테다. 아이들 이름을 입에 올려도, 엄마들을 거론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일관했다. 

그녀의 아이와 한 번 같이 놀았던 아들은 그 아이를 철저히 무시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녀의 플레이 데이트 요청을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거절했다. 당할 만한 얘들만 괴롭혔던 그녀의 아들의 눈에 우리 아들은 해당되지 않았나 보다. 그러니 우리 모녀와는 사건사고가 없었던 터라 그녀는 이렇게 나를 또 찾아오고 그녀의 아들이 괴롭힌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엄마를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그들이 이상하고 내 아들은 정상이라는 메시지를 내게 연거푸 말한다. 글쎄요.... 


아이들 하교 시간이라며 그녀를 돌려보내고, 그다음 날부터 쏟아지는 그녀의 전화는 무시했다. 결국 나 없는 하루 그녀는 여왕의 오후를 찾아왔고 그녀의 무리와 커피를 마시고는 다신 오지 않고 있다. 

나의 공간이 생긴 이상 이젠 피할 방법이 없다. 카페 창업에서 얻은 소득은 마주하기 싫은 인연을 맞닥뜨리고 더 이상 오지 마세요라고 말할 용기를 얻은 것이다. 열린 공간이니 오지 마라고 분명히 말해야 눈 마주치고 앉을 일이 없을 터이다. 카페 매출이 중한데 마주 하기 싫은 이라도 손님이라 여기고 잘해줘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싫은 사람 상대하다 스트레스받으면 괜스레 여왕의 오후라는 공간에 정 떨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피로가 쌓이면 다음 손님께도 정성을 다하기 힘들다. 카페는 달콤함을 제공하는 공간이지, 나의 밀린 인연들이 살풀이하는 공간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전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용기도 내고, 맞닥뜨리기도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도 목소리 높여보아야겠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도 가정라는 미니 사회도 폭력이 발생할 때 가해자는 힘을 휘두를 만한 대상을 고르고 고른다. 선택받은 대상이 사람 잘 못 봤어라고 목소리를 높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말이든 힘이든 폭력을 휘두름의 낌새를 눈치채면 나는 도망갔었다. 이젠 도망가지 말아야지 싶다. 눈치 없이 그녀가 다시 찾아온다면 조목조목 알려줄 것이다.

"언니. A는 언니 아들이 계단에서 밀었고요. B는 놀이터에서 때렸고요. C는 따라다니면서 욕했어요. 언니 아들을 마주하지 않으시면 그 아이는 언젠가 언니한테 그렇게 할 거예요. "

그녀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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