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복잡하면, 책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남편에게 고민을 나누거나 하기 힘들어서 외롭다. 상황을 개척해 나가는 데에 특효약은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데 최고지, 주변 그 누구에게 물어도 위안이나 공감을 받지 못하곤 했다. 그러니, 활자나 영상에 기대어보곤 한다.
남편과 대화하지 않은지가 2 달이라 그간 주말마다 고역이다. 그나마 동생의 디저트 카페를 도우러 나간 지난주까지는 토요일은 종일 나가 있다시피 하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번주는 날 좋은 토, 일 이틀을 어찌한다지. 평일이야 저녁 차려두고 큰 아이 방에 들어가서 글을 좀 쓰고 있다가 남편의 식사가 끝나면 나가 먹곤 했다. 그 시간만 피하면 얼마든지 그의 얼굴을 맞댈 일이 없으니, 없는 사람이다 여기기 어렵지 않다. 문제는 주말이다.
딸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친구와 보고 와서는 대 흥분을 한다. 스토리를 시작부터 꼼꼼하게 말해주는 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친구 없는 아들을 데리고 일찌감치 아침부터 나갈 꿍꿍이를 짜야했고, 보러 갈 것이라면 딸의 스포일을 듣게 되면 보는 맛이 사라져서였다.
아침 첫 영화를 예매하고는 아들을 꼬드겼다. 요새 혼자 15분씩 일본어 공부를 하니 영화 보면 재미가 더할 것이다고, 주말마다 억지로 가는 산행도 제해주겠다고 했다. 딸은 일요일도 종일 친구와 나가 놀 예정이니, 아들하고는 영화 보고 아들이 좋아하는 냉면도 먹으면 되겠다. 그럼 족히 3시는 되겠지.
아이들이 조그맣할 때는 그렇게 잠이 많아 정오가 되어도 못 일어나던 남편은 이제 육아도 하지 않는데 새벽같이 잘 일어난다. 심지어는 주말까지도. 그러니 스케이트장에 간다는 딸이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나서자마자 아들을 데리고 영화관으로 나섰다.
지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자연에게 소중한 하루를 구걸한다. 작은 일상을 오래오래 누리고 싶다고 신령들에게 토로한다.
" 다녀왔습니다. "
" 맛있게 먹겠습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엔 비밀의 문이 존재한다. 그 문들이 다시 열리고 미미즈라는 이름의 기운이 탈출을 하면 지진과 해일 같은 재앙이 그곳을 덮친다. 스즈메가 폐허가 되기 이전 그곳에서 사람들이 나눴을 말들을 떠올리면 스즈메의 눈에만 보이던 그 문에는 문구멍이 생긴다. 스즈메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인간이 자연에게 지고 떠나간 공간에서 희생되어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나눴을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폐교에서는 아이들이 아침인사를 나누고, 고철덩어리만 남은 놀이공원에선 연인들이 속삭인다. 빈 집터에서는 가족들이 들고 나며 눈을 맞춘다.
남편에게 듣고 싶은 말들이었다.
나 오늘 무사히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왔어, 여보. 당신의 하루는 어땠어? 내가 오늘 하루에 진심이었던 만큼 당신도 그렇했겠지? 아침에 서로 눈 맞추고 인사하고 나갔는데 이렇게 저녁상을 함께 하게 되어서 감사하다. 바쁜데도 이렇게 저녁을 준비했군. 고마워. 당신 음식 솜씨는 최고야. 오늘은 특별히 더 맛있네.
눈물이 난다.
그를 미미즈라고, 나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기운 같은 존재라 여기고 그에게 구걸해야 할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 내게 내일이 보장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은 깨닫고 나니 삶이 달라 보인다. 시한부나 심각한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나를 스쳐 지나는 1초, 1분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주고, 공감 한 스푼이라도 더 받고,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기에도 이 삶은 모자라다.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말을 나누지 않고 2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나의 변화가 낯선가 보다. 영화를 보며 하도 울었더니 피곤해서 아들을 데리고 허부적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거실에 염색 준비를 벌려뒀다. 일찌감치 하얗게 새어버린 그의 머리를 염색하는 것은 나의 일이자 즐거움이었다. 부탁하는 말 하기 싫은지 지난날부터 혼자서 하기 시작하더라.
"염색 비율 보내라."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뒷목이 뻐근해보기 시작한다. 눈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깔고 센 사투리로 그가 말할 때는 일어나는 일이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나니 당황스러워서 나도 모르겠다고 하고 방문을 닫으려 하니 힘으로 문을 막는다.
"보내라!"
염색약을 섞는 비율은 두세 번의 시도 끝에 꿀배합을 발견해 내었었다. 핸드폰 메모를 뒤적거리니 저장해 둔 숫자가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톡을 보내고 나니 눈물이 또 난다. 울보. 영화 보면서 남편 생각에 그리 많이 울었는데도 남은 눈물이 있다니, 대단한 눈물샘의 소유자 호박씨다.
다음번 영화는 남편이 좋아하는 조폭영화였으면 좋겠다. 코믹해서 그와 함께 웃으며 볼 수 있으면 한다. 폭력물이나 코미디물은 내 취향과는 거리가 꽤 멀지만, 그가 예매한다면 같이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야지. 내게 그런 날이 올까? 조언하는 영화가 아니라 생각 없이 즐길 영화를 보러 가 날이 오길 기도해 본다. 오늘 흘린 눈물 모아 모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