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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pr 16. 2023

철들어 산 면접 정장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동네 유명 수학학원 데스크 직이다. 20년 만의 면접이다. 뭘 입고 가나가 먼저 떠오른다. 취업이 코앞인데 친정엄마 앞에서 PC를 집어던졌었다. 20년 전의 나는 "나보고 뭐 어쩌라고" 하며 소리를 질렀다. 취업이고 창업이고 다 필요 없고 의류 디자인 유학 보내달라고 했잖아라고 우기는 시간을 2년 정도 보내고 나니, 우울증이 찾아왔다. 학교를 가지 않고 낮시간 내내 자고, 밤에 되면 일어나 대충 먹고 밤새 폭탄 터뜨리기 게임을 하다 원서를 쓰고, 원서를 쓰다 정수리 머리를 뜯어 원형 탈모가 찾아왔다. 성적은 바닥이었고, 사회성 없어 보이는 눈빛인 데다 그때까지도 세상에서 제일 쉬운 부모 원망을 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였다. 50여 개의 이력서 끝에 10군데 정도 면접을 보았는데 족족 떨어졌다. 

 면접을 본 중에 가고픈 곳은 두산 ( 당시 폴로 등의 브랜드를 수입했다.), 빙그레, 로레알등이었네. 아, 삼성전자도 가고 싶었다. 냉장고 및 생활 가전에 대한 PPT를 봐야 했는데 어찌어찌 면접까지 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렇게 5월이 찾아왔다. 2월 졸업이지만, 10월부터 취업이 되는 동기들도 있었다. 그러니 절친 4인방 중에서 나만 홀로 남아 취업 공고를  살피고, 원서를 넣고, 정수리를 긁적이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러는 6개월 동안 엄마는 계속 침묵했고, 말 걸기 싫은 나는 면접을 보러 갈 정장이 필요했다. 그때까지도 패션이 좋았고, 시각적으로 내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정장을 입어야겠다 싶었다. 급하지 않았나 보다. 검은색 치마 정장 한 벌이면 되었을 테다. 것도 저렴한 곳에서 사면 당시 5만 원이면 되지 않았을까? 면접이 잡히기 전일찌감치 동대문에 가서 팥죽색 양모정장을 샀다. 

 팥죽색은 이럴 테면 핑크와 살구색의 중간쯤에 회색을 한 방울 떨어뜨렸달까? 양모 정장이란 도톰하니 두께가 좀 있어 부드럽고, 세련되어 보인다. 손목 바로 위엔 핸드메이드 라벨이 붙어있어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5월까지 면접을 보러 다닐 줄은 몰랐다. 겨울 안에 이 양모 정장 입고 면접에 붙어 출근하게 되면, 엄마한테 출근복 사달래야 지 싶었다. 봄이 오도록 취업은 되지 않았고, 결국 검고 싼 재킷을 하나 사서 입고 단정하기만 하게 입고 간 의류 회사 영업직 면접에 붙게 되었다. 그러니, 양모 정장 따위는 돈만 버린 셈이다. 

 취준생 기간 내내 면접 보고 돌아오는 길이면, 면접비로 받은 2만 원 정도 들은 봉투를 들고 백화점으로 가서 제일 비싼 립스틱을 샀다. 그 면접이 떨어졌다는 통보를 받으면 여자라서, 학점이 안 좋아서, 예쁘지 않아서 안된 거라며 거지 같은 세상과 부모를 탓했다. 남자였으면 벌써 붙었을 텐데, 키 좀 컸으면 좋았을 텐데.... 남 탓 하기란 쉽고, 나 자신을 꿰뚫어 보는 일은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일보다도 더 하기 싫었다. 





뭐 입고 가지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신 못 차렸구먼, 호박씨. 학원 정보를 검색했다. 블로그가 있다, 다행히. 찬찬히 블로그를 보니 평이 좋은 수학학원이다. 지점이 10개나 되고 절반은 사는 집 주변이다. 여러모로 괜찮다. 출근하기도 가깝고, 중학생인 딸의 수학실력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과외 경력이 15년이었으니, 지나온 시간 하고도 연결이 있어 면접 보러 오라는 요청도 받은 셈이다. 그들과 나는 합이 잘 맞을 확률이 높다. 

아... 20년 전 나를 지나쳤던 회사들은 그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결혼과 같다. 동시에 모든 이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이 맞는 서로가 만나야 함께 행복할 수 있다. 같이 성과를 낼 수 있다. 지옥처럼 회사를 다니지 않을 수 있고, 회사도 월급주기 아깝지 않고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환상이 걷히고 내가 선택한 배우자의 참모습을 맞닥뜨렸다. 그와 대화할 수가 없어 소통을 포기하고 있는 지금, 면접도 일도 심지어 결혼도  결국 상호 간의 인연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아무거나 입고 가련다. 묻히지 않고, 깔끔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면접관들은, 학원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사람은 나를 대하는 3초 만에 내 눈빛과 마음가짐을 읽을 터이다. 마흔이 넘은 나 또한 이젠 그러하니까. 철들었다 철들었어, 호박씨. 

 당근에서 아르바이트, 파트타임 직을 구한다고 했더니 친정엄마는 노여우신가 보다. 

"얘들이나 돌보지."

엄마, 저 제대로 엄마 노릇하려고요. 그래서 일하러 나갑니다. 제가 돌보고, 키우는 것이 그들을 나약하고 의존적인 인간으로 만들 거예요. 20년 전 전의 저처럼 어리석게 엄마를 원망하는 어른으로 키우지 않으려 해요. 그러니, 전 시간당 9천 원이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명문대도, 결혼도 나를 깨치게 만들진 못했다. 아프고, 어리석던 시절을 바라보는 가시밭길처럼 쓰라린 시간 덕에 갈기갈기 찢기고 상처 나고 그 상처가 아물어간다. 이제야 안다. 내일이 주어짐이 감사하다. 제대로 면접 볼 기회가 와서 고맙기 그지없다. 아무거나 입고 가야지!  떨어지면 어쩌냐고? 당근 알바를 다시 열면 된다. 걱정 마시라. 내겐 아직 튼튼한 손가락과 핸드폰 그리고 건강한 정신이 있으니 말이다. 



대문 사진: UnsplashAdeolu Ele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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