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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pr 17. 2023

누구에게나 꽃은 피게 마련

 걸어서 10분이면 강남역 한복판이다. 타워레코드 맞은편에 오디세이가 있었고, 오디세이에 죽치고 드나드는 반도체 회사 사장님 딸이던 친구가 부럽던 시절이 있었다. X세대의 끝물에는 거품이 꺼지고 파티가 끝남을 알아야만 했던 IMF 세대가 있었다. 그런 IMF는 딴 나라이야기인양 클럽을 즐기고,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간 김에 유학으로 시간을 보내던 그런 이들처럼 조건 없이 돈이 나오는 도깨비방망이가 있으면 했다. 

 수업이 끝나고 분당으로 가는 광역 버스를 타기 위해서 강남역을 지나가는 일이 고역이던 때였다. 학교는 또 어땠냐면 어학연수는 다들 한 번씩들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로 집안 형편이 가늠되었다. 장학금을 받거나, 교환학생으로 외국대학에 가는 동기들도 있는가 하면, 미국이나 영국에 간 김에 편입을 하는 이도 있었고 나처럼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어서 업으로 삼는 것이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이도 있었다. 



면접을 보게 되었다. 동네 학원가의 데스크 직이었다. 실장이라는 직함이 경력 단절된 내겐 부담스럽기도 했다. 반면, 경력을 이어가 계속 회사원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이제 팀장, 전으로 치면 부장급인터라 학원 데스크 자리도 될까 안될까 조바심 내니 허무하기도 했다. 사라진 15년 동안 내가 쌓은 내공은 분명 있을 거야. 나만 인정해 주면 되라며 다독다독했다. 집에서 걸어 20분 정도의 위치였다. 명색이 면접이지만, 가장 편한 신을 신고 40분 전에 출발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혈액 순환을 시켜서 혈색 돌게 해서 볼 작전이다. 

칙칙한 40대는 실장님으로 쓰기엔 적합지 않을 것이다. 


학원장은 곱게 나이 든 50대였다. 어제막 백화점 쇼윈도에 걸려있었을 트위드 재킷에 잘 어울리는 큼지막한 진주 귀걸이와 오너임을 증명하는 운동화가 첫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지속적인 적당한 업무로 혈색 좋은 얼굴과 관리 잘 받아 매끄러운 머리결도 인상 깊었다. 

" 중요한 건 실적이죠."

"우리 아들 학교 대표하라고 하길래, 그냥 천만 원짜리 그랜드 피아노 한대 기부했어요."

" 학원 매출은 전 가져가지도 않아요. 법인에 두지. " 

모자랄 것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40대는 어땠을까?

피부가 칙칙할까 봐 걱정하거나, 걸어서 면접을 보러 갈 테니 신던 단화를 신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 

당장 출근하시죠라고 하는 그녀의 승낙 사인에 뛸 뜻이 기뻐야 하는데, 자꾸 낡은 신발끝이 보인다. 챙겨 입고 간 재킷은 오늘따라 왜 이리 구깃해보이는 것인가? 

 

 


 식물마다 꽃 피는 시기는 다르다. 같은 식물이어도 환경이 다르면 꽃이 피기도 피지 않기도 한다. 필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는 꽃이지만, 활짝 인 그 순간은 우주가 그 꽃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인다. 베란다의 군자란이 두 화분 키우고 있다. 옮겨심기도 같은 날이었고 우리 집에 온 날도 같았다. 둘은 나란히 자라고 있는지라 환경도 거의 비슷하다 하겠다. 한 녀석만 열흘 전에 오렌지색 망울을 터뜨려 만개했다. 잎이 좀 더 풍성한 다른 녀석은 먼저 핀 꽃이 시들어 오므라질 때 쯔음해서 얼굴을 들더니 서너 배는 많은 꽃망울을 맺었다. 오늘에서야 한창이다. 혼자 보기 아까울 지경이다. 베란다 밖에 들고나가 얘 좀 보세요 하고 싶을 만큼 화려하다. 

말 못 하는 군자란이지만, 애 태웠을까 싶다. 쟤는 한창인데 난 뭐 하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자란은 쉬지 않았다. 조용히 묵묵히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자신에게 맞는 때를 기다렸을 따름이다. 

내 꽃은 이제 시작이다. 그러니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꽃은 피게 마련이다. 


오디세이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을 한 나의 친구는 1년 만에 이혼을 하고 싱글이 되었다. 2년 터울로 아들, 딸 낳고 기르느라 바쁜 사이에 친구와 연락은 드문드문했다. 얘들을 데리고 카페에 가리라고 큰 마음을 먹고 남편의 도움을 구했던 날이었다. 아이들은 세 살, 한 살쯤이었나 보다. 임신 기간 동안 못먹어 한맺인 아이스 카페 모카 그란데를 한 입 하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혼집도 친구가 준비하고, 결혼하고 주유소를 사준 부모님 덕에 친구의 신랑은 단번에 사장이 되었지만  이혼으로 집은 1년은 못 채우고 비우게 되었다. 주유소는 친구의 아버지가 매니저를 구해 운영하게 되었다. 전화기를 타고 내리는 친구의 목소리 톤을 느낄 새도 없이 카페 놀이 처음 하는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몇 년 만에 와본 스타벅스인데 난리 치는 이 녀석들 때문에 통화가 쉽지 않다고 토로하자 

"넌 다 가졌구나."

했다. 오디세이와 캐나다, 주유소를 가진 그녀가 부러워했다. 스타벅스에도 힘겹게 통화하는 내가 부럽다 했다. 

 아마도 1차 꽃 피움은 그때였나 보다. 나라는 생명의 작은 꽃은 그때가 한창이었나 보다. 한번 피워봤으니 또 피겠지. 자신은 없지만, 슬프지 않다. 허무하지도, 부럽지도 않다. 내 꽃은 오늘부터 피울 준비를 하는 중이라 바쁘기 때문이다. 츄리닝만 안 입으면 되지, 청바지까지는 괜찮다고 하신다. 원장님 본인은 멋스러우신데, 직원들 패션은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단다. 취업하면 신용카드로 옷부터 원장님 비슷하게 코드 맞춰야하나 면접 내내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 없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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