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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pr 19. 2023

순진한 그녀는 안녕

"누나는 코코아 가루를 듬뿍 넣어서 제대로 맛있게 만들던데."

"엄마 된장으로 끓이면 엄마 된장찌개처럼 맛있겠지?" 


남편과 사는 게 아니라, 여자 넷 ( 어머니, 시누 셋)과 함께 사는 기분이었다. 옷을 골라주면 엄마나 누나가 샀던 브랜드의 매장을 들어갔다. 내겐 너무 올드한 버버리, 내겐 부담스러운 핑크가 그의 취향이었다. 난 난데.... 

누나들을 미루어 생각하면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할 확률도 떨어진다 여겼을 것이다. 15년의 그의 성격으로 그랬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렇게 조각나고 깎이면서 흩어져버리고 나니 이렇다간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싶어 선택한 침묵이다. 


침묵에는 죄의식이 따른다. 아이들에게 평화로운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 안정적으로 자라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말없이 일하러 나가고, 딴 사고를 치지 않으며 제때 퇴근하고 제때 출근하는 기특한 가장에게 3개월의 음소거는 심한 게 아닐까 하고 마음 한 구석에 유교로 교육받고 무장된 내가 구시렁 거린다. 

'닥쳐' 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오늘처럼 바쁘고 힘든 날은 지친다. 사서 고생을 하네 싶다. 오빠 오빠 하며 맞춰주고 장하다고 떠받쳐주고 속 없는 사람처럼 시댁 식구들이 희한한 소리 하면 실실 웃으면서 바보 천치처럼 살면 몸은 편한 거잖아.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때로 돌아가자며 부추긴다. 



" 책임감이 강하고 빠릿빠릿하신 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원장님 하시는 이야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는 게 좋아요. "  첫날부터 내부 고발이라니.... 쯧 


인근 잠원점에서 학원 데스크 업무를 맡고 계신 실장님을 뵙고 인수인계를 하라고 그제 전달받았는데, 뚱딴지처럼 2시에 바로 근무하게 될 반포점으로 나오라 하신다. 연락은 심지어 원장님이 아닌 잠원점 실장님이 하셨다. 2시가 조금 못된 시간에 타미플루 주사를 맞고 하얀 입술로 자고 있는 아들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학원으로 걸어갔다. 

" 오늘부터 일하시는 거죠? 저는 2시까지 못 가니까 일단 들어가서 컴퓨터 켜서 옆에 있는 문서 보고 연구해 보세요."

원장님은 2시 10분 전쯤 전화를 주셨다. 아들의 A형 독감 소식에도 원장님은 눈도 깜짝 안 하신다. 나도 보균자일지 모르고, 증세가 아직은 심하지 않지만 아프기 시작했으니 원장님께 전염될까 봐서요 해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게다가 오늘부터 일한다고? 애라, 모르겠다. 가던 길을 서둘러 가본다. 2시간만 업무를 살펴보고 아들 약을 챙겨 먹이러 집으로 돌아가려면 갈 길이 바쁘다. 

우두커니 1시간 정도 전임자의 흔적을 훑었다. 인수인계를 해두고 가려고 최선을 다한 이전실장님이 느껴졌다. 그녀는 교회를 다녔고, 세례명은 안나였으며 글씨체가 힘이 넘친다. 그녀가 작성해 둔 문서 2개는 원장님 말씀대로 데스크에 있지 않았고, 컴퓨터 주변을 뒤적거려 찾아냈다. 

한 시간을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양은 종이 깜장은 글씨라 여기고 읽고 있는데 P선생님이 나타나셨다. 원장님과는 오랜 인연이시라는데 딴 판이다. 

그녀가 내게 말한다. 남의 학원이려니, 남의 원장이려니 생각하고 다니지 않으면 힘드세요. 실장님들 여럿 그만두셨어요. 내가 마음에 들어서 해주는 이야기인 것처럼 첫 만남부터 정 많고 이야기도 많은 P선생님. 

음... 이젠 낯선 곳에서의 첫 호의는 사실 믿지 않는다. 마흔을 넘기고 나니 공식 같은 것도 생기더라. P 선생님 보단 새침하니 들어와 강의실로 쏙 들어가며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L 선생님이 진국일 가능성이 크다. 자기 할 일은 열심히 하니까 말이다. P 선생님은 학생에게 문제 풀라고 하고는 강의실에서 나와 내게 원장님 스타일에 대한 조언을 준다. 

"제가 시누가 셋이라서요. 15년 동안 강훈련을 받아서 웬만하면 괜찮아요. " 

미혼이신 P 선생님의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벌어진다. 


시누 부자가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도 있구나. 어지간한 말을 해서는 놀라지도 않을 바다. 그들보다 더할까? 그들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는 남편과 시어머니보다 더할까 싶다. 시간이 허투루 지나가지 않았다. 순진한 호박씨는 안녕이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서도 독박으로 얘들 키우고, 사기 안 당하고 성한 몸으로 살아 돌아왔는데 한국에서야 뭔들 못하랴 싶기도 하고! 


사진: Unsplashfe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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