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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pr 24. 2023

금새 사랑에 빠졌었지

남편은 술에 약하다. 나도 만만치 않게 약해서 둘이 소주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해 남기던 연애시절이 있었다. 남편은 술 약하단 말은 하지 않고 회사를 다녔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는다. 못 먹는다는 말을 하지 않기에, 남편의 몸상태는 어떤 상사를 만나는 가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독일 발령이 나고 첫 번째 법인장님은 사내에서 유명한 술고래. 법인장님 댁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아파트로 우리 집을 정한 것은 법인장님 이셨다. 아마도 대리비가 아까워서 또는 술 먹고 다음날 태우러 오기 편하려고 정하셨으리라 곧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잔뜩 먹고 비틀거리며 들어온 남편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 내가, 법인장님하고 출장자 P를 태우고 돌아오는데 둘 다 엄청 취했거든. 뒷 좌석에 퍽퍽하는 소리가 나는 거야. 둘이 주먹다짐을 하고 있더라고."

 남편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시부모님이 싸울 때 어린 남편은 저랬을 것이다. 법인장님이 시키는 데로, 법인장님 마음에 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눈치 보는 남편은 법인장님을 존경하는 듯해 보였다. 믿고 신뢰했으며 법인의 다른 한국인 직원보다 각별하게 총애받음을 즐겼다.

둘이 싸운다 해도 남편의 신변과는 상관이 없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니, 위로도 하기 힘들었다. 남편은 존경하는 윗사람에게 스스로를 이입하고 자신이 주먹다짐을 한양 신경을 바싹 세우고 있었다.




"그녀가 밤낮없이 보내는 문자 읽씹하면 기분 나빠해요. 처음부터 다 해주지 말아요."

출근 나흘 . 오늘은 지난주에 면접을 보며 뵀던 학원 다른 지점 A실장님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신다. 뭐지?

늘 신입 실장 교육을 담당했는데, 원장님과의 불화로 이번 나의 신입 교육은 못하겠다고 했단다. 나 때문이 전혀 아니며, 원장님 때문이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원장님께 묻고 신입 교육을 시켜달라고 부탁하라 하신다.

그걸 왜 내가 부탁해야 하지?

교육 안 시켜주면 시급을 받는 나는 일을 할 수 없다. 놀 수 있단 뜻이다. 일 못해도 된다는 뜻이다.


출근 첫날 원장님은 나의 2시 출근을 아셨지만 4시에 오셨다. 현관 비밀 번호도 문자로 알려주셔서 첫 출근을 내 손으로 했다. 문자로 책상에 2개의 서류가 있으니 읽어보면 업무 이해가 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인수인계 문서였다. 일한 지 오래된 이전 실장인가 보다 했다. 학원 업무 경력이 많은 이야 이런 서류를 읽고 바로 업무에 돌입할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다. 이미 이력서를 보고 알았을 터인데 뭘.

 

'오늘은 원비 문자 보내야 해요.'

원비 문자는 추측하건대, 아무개 어머니 이번달 원비 얼마 입금해 주세요 하는 개별 문자일 것이다. 나 또한 고액 학원을 보내는 중학생 엄마다. 오케이. 내가 아는 것이 이게 다다.

원장님이 출근하신 6시까지 놀았다. 신나게 놀았다. 글 쓰고 또 글 쓰고 원장님이 두고 가신 '원씽'도 읽었지만 정말 비추였다.  

3시쯤 불안감이 왔다. 사흘간 봐온 원장님은 나의 퇴근 시간인 7시가 다 되어서 오실 것 같은데 미리 문자를 보내두고 싶다. 여유 있게 잘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원장님, 언제 오시나요?'

'왜요? 무슨 급한 일 있어요?'

네, 원비 문자 보내야 한다면서요. 저 출근한 지 1시간 넘었는데 할 일이 없어요.

' 아니요. 원비 문자 보내야 한다고 하셔서요. '

' 아, 곧 가요.'

그 '곧'이란 출근 시간 4시간 후인 6시였다. 오자마자 그녀는 컴퓨터 옆에 앉더니 비밀 번호를 잊었으며, 구글 드라이브에서 헤맸고, 엑셀을 할 줄 몰랐고, 단체 문자 발송 서비스 사용법도 알지 못했다.

내가 인수인계받을 사람은 A 실장님이었지만, 교육은 받지 못했고 문자를 보내야 원비를 받을 수 있는 원장님은 문자 발송법을 포함한 전 과정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이 분이 3개 지점의 원장 겸 대표이시다.


A 실장님이 조언해 주셨다.

" 잘하려고 하지 말고, 내 학원이다 여기지 말고 아르바이트생으로만 지내요."

당연하죠. 본인은 그렇게 지내지 않으셨나 보다. 면접 보러 오라며 전화 통화를 했던 3분 정도의 시간과 면접을 보러 가서 그녀와 나눴던 3분 정도의 대화, 10분이 안 되는 그 시간 동안에 A실장님은 좋은 엄마이시겠구나 했다. 면접을 보고 떠나는 나의 뒤에 주먹을 들어 " 파이팅!"을 외쳐 보였으니까.

 그녀가 좋은 엄마일지는 몰라도 능력 있는 직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A 실장님이 만약 원장이었다면, 꽤나 피곤했겠다 싶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집 안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가장 뛰어난 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야 나와 가족이 행복하다고 여겼다. 남편에겐 최선을 다하는 중이니 너 또한 내가 기대하는 바를 모두 총족시키라고 요구했었지만, 그는 바뀌지 않았고 버거워했다.

그러니, 15년 만에 마음에 새겼다.

" 그래, 내가 애들에게 아빠까지 할게."

웬만하면 얘들에게 아빠욕은 하지 않는다. 두 달 전부터 굳게 마음먹었다. 아무리 그가 마음에 안 들어도, 아이들에게 그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로써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원장님도 원장님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원장님의 큰 장점은 고객에게 철저하다는 것. 그녀의 고객인 학부모와 원생들에게 끔찍한 그녀다. 각 교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리를 가만 들으면 윽박지르고 얼르고 다그치기고 한다. 과외식이라 한 수업에 많아야 3명이니 그들은 숨 쉴 틈 없이 가득 찬 2시간을 수학으로 채운다. 원생들의 실력은 그렇게 자라난다.

수업이 끝나고 기운이 다 털린 아이들이 나오면 원장님이 높은 텐션으로 아이들에게 예뻐라를 외치신다. 데스크 앞에 둔 젤리와 사탕을 더 가져가라고 계속 권하며 힘들지, 힘들지 하고 말해준다. 학부모에게 전화하면 그녀는 두말없이 죄송하다로 시작해서 죄송하다로 끝난다. 감사하다로 시작해서 잘 할꼐요로 끝냈다. 그녀는 대단한 영업인이며 훌륭한 대표다.

 내겐 그녀의 장점이 계속 보인다. 그러니 이 학원 또한 나를 자라게 하는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간 약속은 지키지 않을지언정, 그녀는 7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근하는 내게 하던 거 마저 하라며 오늘 문자 다 보내야 한단 말 한마디가 없다.


그럼 된 거지.

" 선생님, 이거 본 적 없어요?"

알려 주지도 않은 것을 자꾸 아냐고 원장님이 물으신다.

" 모르는데요."

" 본 적 없어요."

" 처음 듣는데요."

사실이다. 예전의 나는 이 세 마디를 하지 못해 '척'을 하며 살았다.

아는 척, 있는 척 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그 척들로 나를 스스로 얽매고 뒤돌아 후회했다. 할 수 있는 척하다 못하면 좌절하고 자책도 심하게 했었다.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나를 아껴줘야 한다. 그러니 알아도 모른다 하자. 시급 만원 짜리 알바다. 알바에게 뭘 바라겠는가? 사고만 안치면 되지.





  누군가와 금세 사랑에 빠지는 이를 금사빠라고 한단다. 남편은 여전히 금사빠일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사랑했다. 내 회사처럼 일했다. 월급만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칭찬받으려고 일했던 그를 몰랐다. 나 또한 금사빠였기 때문이다.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이 내 눈엔 어찌나 다들 멋있어 보이던지. 돈 많은 시누와 의대 나와 개원해서 돈 잘 버는 아주버님들, 그런 사위를 마련한 어머니까지 완벽하다 싶었다.

 그들에겐 나름의 사정과 고통이 있으며,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원장님도 아니 그렇겠는가? 아들과 싸우기 싫어서 , 공부시키기 힘들어서 국제학교에 넣었다는 원장님은 아들이 지나가면서 툭 던진 영어 단어에 감동받았다 한다. 그 순간만은 그녀도 엄마다. 아들을 어찌할 수 없는 엄마다.

모두에겐 각자의 자리와 사정이 있는 법이다. 그 삶의 무게 또한 각자에겐 가장 무겁긴 마찬가지다.

 

사진: UnsplashSamantha Fort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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