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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pr 25. 2023

쓴 맛 알바

쓴 맛을 보는 중이다.

자정에도 문자를 보내고, 익히 약속된 퇴근 시간 7시가 넘어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 인수인계 없이 10장 정도의 문서를 읽고 난 상태에서 이건 왜 모르냐고 한다. 타 지점의 기존 실장님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한다. 뭘 알아야 물어볼 것도 생길 텐데 말이다. 말 귀를 잘 못 알아 들어서 정리해서 이야기하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아이고야.....

이게 세상의 맛이다.


허술한 그녀는 스스로를 열린 사람이라 표현했다. 그 말은 아무 말이나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출퇴근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했다. 본인은 시간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출근 만 3일 만에 지구별의 새로운 인간형을 수집한 기분이다.

 재미있다. 그 누구에게도 그녀를 욕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즐기는 중이여 서다. 그녀에게 할 말은 다하고 있는 중이라서 딱히 험담이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이렇게 기록에 까지 남기고 있는 중이다.


사실 그녀가 바쁜 탓에 정신없이 흐트러져 있는 일들을 해결해 나가는 맛도 있다. 엑셀 파일 6개를 주더니, 광고 문자를 발송해야 한다고 한다. 어디서 얻은 개인 정보인지, 딱 봐도 아파트 동 대표들의 번호다. 시세가 20억이 넘는 주변 아파트 리스트와 동 옆에는 핸드폰 번호가 적혀있다.

이전 실장님은 금방 했다며, 어떻게 하는지는 알아서 하라는 투다. 그렇지 뭐.

검색하니 나오길래 혼자 따라 하던 중에 타 지점 실장님께서 전화가 왔다. 그녀의 설명 대로 따라 하니 되질 않아, 전화를 끊고 지식 검색대로 따라 하니 잘 된다.

학원용 핸드폰은 100년은 되어 보이는 구 모델이라 2000개의 전화번호를 소화해내지 못한다. 타 지점 실장님이 본인은 답답해서 자신의 중고폰을 학원으로 가져와서 쓰고 계신단다. 난 그럴 순 없지.

" 원장님, 오늘 문자 발송 못해요. 폰이 너무 낡아서 번호 다운로드가 안됩니다."

급한 것은 원장님이다. 오늘 꼭 광고 문자를 발송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녀지 내가 아니니까.

1초간 씩씩 거리던 그녀는 진짜 바쁘지만 내일 다른 폰 들고 학원으로 오신단다.




동생과 틀어져 디저트 카페로 출근하지 않는 동안이 내겐 가장 바빴다. 거실에 앉으면 책장에 더는 읽지 않는 책들이 보인다. 예스 24나 알라딘은 책을 매입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서, 권당 가격을 바로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실컷 읽고 지나쳐버린 책들도 하나씩 훑어보며 정리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들의 책 선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지난 1년 동안 어떤 것들에 관심이 있었는지도 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독일에서 샀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와 패물 중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준보석들을 정리했다. 화장대 위칸은 이쁜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거기에 존재하는지 조차도  잊고 지낸 물건들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앞으로 1년 동안, 학원으로 아르바이트를 나가면서 이들을 이용할 일은 없다. 말만 실장이지 시급 만원의 알바는 액세서리를 필수가 아니라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러니 당근에 저렴하게 올려본다. 이제 막 입사했거나, 한창 멋 낼 나이의 아가씨들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며 고마워한다. 저도 이 물건들과 함께 해서 좋았으니, 좋은 주인이 되실 겁니다 하고 기분 좋게 팔아넘겼다.

 가방정리는 아직 못했다. 아까워서 아직 하지 못한 것은 아니고, 얼마 정도가 적정 가격일지 몰라 검색 중이다. 즉시 올리자마자 팔렸으면 좋을 정도의 가격으로 정해야 할 텐데, 그간 중고 플랫폼이 여럿 생겨 어디를 사용하면 가장 효율적일까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백을 사던 날들을 기억한다. 가격까지도 선명히 기억하지만, 지금의 내겐 이들이 필요하지 않으며 앞으로 1년간 필요하지 않을 예정이다.





정돈되지 않은 원장님의 또는 전 실장님의 공간에 가만 앉았다. 그 공간이 홀로 나를 맞았다. 출근 첫날도 원장님은 내가 등원하겠다고 한 2시에서도 한참 후에야 나타나셨으니까 말이다. 사부작사부작 원래 내 것이었던 것 마냥 정리를 시작했다. 버려도 될 법한 것들은 한데 모아두었고, 서랍별로 분류도 했다.

강사선생님들의 성격도 제각각인데, 내 이름은 아무도 묻지 않았으며 원장님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며칠 뵜다고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눈 한 선생님이 출근하자마자 눈이 동그래지셨다.

" 정리하셨어요?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원장님이 이렇세요."

네, 알아요. 그랬을 것 같아요.

블링블링한 스타벅스 머그 속엔 며칠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커피가 담겨 있었고, 문방구와 중요 서류 그리고 법인 카드는 한데 뒤섞여 있었다. 학원 법인에 대한 정보는 서랍 정리를 하니 모두 나왔다. 원장님은 서랍이 정리된 줄 아는지 모르는지 한마디 말이 없다. 당연히, 그녀는 정리되었는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할 바이다.


새 일에 임하는 나의 마음가짐이다. 어떤 상황이든 호박씨는 호박씨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로 나는 규정되지 않는다. 알바로 대하건,  실장으로 대하건, 경단녀로 대하건 나는 나일뿐이다.

다정함을 좋아한다. 도전도 사랑한다. 따분한 것은 질색이며 어지럽게 벌려두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숨 쉬는 공기는 청아해야 하고, 눈에 보이는 짜임은 명료해야 한다. 그러니, 단 하루를 일한다 해도 존재하는 이 공간은 내 스타일 대로 하련다.

이런 다고 자르진 못할 것 같다. 또박 할 말 다하고 공간을 정리하는 것은 내 보낼 사유는 되지 못할 예정이니까. 게다가 일을 벌이고 다니시는 바쁜 원장님은 학원 데스크를 지키는 실장이 하루라도 없으면 안 될 만큼 잔업은 아는 게 없으시다. 최저 시급으로 호박씨 같은 실장은 못 구할걸!


사진: UnsplashAdomas Al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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