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을 뒤지면 139만의 비취업자가 나온단다. 139만의 기혼 여성은 결혼 와 가족 돌봄을 이유로 일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139만 명 중 한 명 여기 있다. 내 허락 없이 나를 숫자 속에 집어넣었겠다. 이 139만 명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동남아 이모님들이 도입되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왜 나가는지 답 해줄 수 없어."
최선을 다해 담담하게 답해줬다. 그의 템포와 기분에 말리면 안 된다. 그가 바라는 답은 대기업 외벌이 월급에 만족하고, 얘들을 달달 볶아 공부시켜 SKY 보내고, 그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밥을 차리며 살아가겠습니다 일 것임에 분명하니까. 질문 아닌 질문엔 답이 없다.
" 6시까지 퇴근해!"
대꾸하지 않으니 마누라 때문에 화났으니 방문을 있는 힘껏 닫아본다. 본인 방 전원을 누르며 화를 심어 본다. 스위치가 떨어져 나갔다. '나 화났다고!' 여러 방면으로 알아주길 바라는 10살 정도라고 여기면 그의 행동은 이해가 된다. 그가 언제 40대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그 자신조차도 예상할 수 없다.
10살로 생각하니 남편이 조그마해진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와선 내 옆에 앉는다. 스스로 화를 좀 달랜 눈치다. 그래, 15살쯤으로 취급해 주자.
15살이 이해되는 수준에서 답을 주었다. 생활비가 150만 원 정도 부족하다고 하면 납득하겠지 싶었다. 작년엔 150만 원이 아니었는데, 왜 액수가 늘었냐 반문하기에 얘들은 계속 크고 물가는 연일 오른다고 했더니 눈을 굴리더니 마이너스 통장 내면 된단다. 중1인 딸이 고1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하란다. 그랬봤다 고작 4년, 겨우 7천이란다.
월급 노예처럼, 회사의 종인 양 살고 있는 그다. 내 회사인 듯 일하는 그가 멋있다 싶을 때가 있었다. 언젠가는 자기 사업을 하겠지 싶었다. 착각이었다. 그만두지 않을 만큼 나오는 월급, 누구나 알 수 있는 대기업 직함, 생각 없이 집을 나서고 꿈 없이 일을 시작하는 하루에 남편은 중독되어 있다.
"세상이 변했어.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고. 얘들은 매일이 다르고. 당신이 결혼하면서 세웠던 플랜대로 살아지지 않아."
제발 내 말이 그에게 닿길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 답했다. 세상은 변하는데 왜 당신은 내게 그대로 있으라고 하나요?
밝음이다. 전형적인 대륙인의 골격이다. 늘씬하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뿔테 안경, 매끄러운 영어 발음을 가진 P는 Aupair라는 독일의 보모 비자로 독일에 1년 넘게 지내는 중이었다.
A1, 독일어 초급을 구사하는 만 18세 이상의 고등학교 졸업자는 월 260유로, 30만 원이 안 되는 용돈과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독일 가정의 입주식 보모가 될 수 있다. 오페어 공식 웹사이트에는 역시나 붉은 머리칼에 튼튼한 골격의 어린 동유럽 여성이 다정하게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중국인 오페어를 기대하는 독일인을 드물었겠다. P처럼 씩씩한 기운을 풍기는 이라면 면접도 훌륭하게 치렀겠지. 오페어로 독일에서 지낸다고 말하는 P에게선 콜럼버스나 마르코 폴로가 느껴진다. 그들이 여성으로 환생했더라면 P와 같았을 거야.
내내 P를 생각했는데 1년 후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신기했다. 독일을 떠나기 전 독일로 불러와 쇼핑도 여행도 하는 그녀를 프랑크푸르트 번화가 Zeil 백화점 여자 화장실에서 만나게 되었다. 여전히 그녀는 밝음 뿐이었다. 독일에 대한 어떤 아쉬움이나 고생의 흔적을 그녀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미안함이 차올랐다.
오페어인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순간, 내가 독일에서 하는 일은 오페어 수준인가 싶었다. 그녀와 한마디를 더 나눌수록 내 수준은 용돈 260유로짜리의 인간이 되어가는 듯해서 그녀와의 첫 만남이 유쾌하지 않았다. 친한 척하지 말아 줄래? 내가 그녀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였다.
돈다발을 짊어지고 오는 중국 여행객과 사업가들 외엔 현지 생활을 하는 아시안 만나기란 쉽지 않은 때였다. 한인들은 폐쇄적이고 돈 없는 중국인은 드물고, 일본인은 극소수인 프랑크푸르트 생활에서 영어 하는 동북아인을 만났으니 그저 반가운 듯 보였다.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말하고 싶고, 어디서 끼니를 해결하는지 궁금한 그녀의 순수함이 걸리적거렸다. 거리 유지 해줄래? 마치 그녀의 사정이 내게 옮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독일 국제학교엔 수많은 보모들이 있다. 재벌집 아이들과 플레이데이트를 하려면 보모들과 컨택해야 한다. 보모들과 이럭저럭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기분이 더러워졌다. 내가 하는 일이 딱 보모급이다 싶었다. 독일인학부모들에게 보모취급을 당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동양인이기 때문이다. 돈 많은 독일 부모는 영어 잘하는 서양인으로 보모를 쓰고 싶어 하기 때문에 국제학교엔 동양인 보모는 거의 없었다. 한인타운을 방불케 하는 주재원들의 숫자 덕에 학교에서도,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보모로 나를 대하는 이는 없었다.
"당신이 가져다주는 월급, 정확하게 절반은 내 거야. 앞으로 생활비를 주내 안 주내 소리 다신 하지 마."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처참하다. 한국인 입주 도우미가 받는 월급이 300만 원이라는데, 남편이 벌어오는 월급의 절반은 300만 원에 못 미친다.
전업주부란 돌봄의 직업을 선택한 순간 자의 반 타의 반 포기하게 된 바가 '자신을 돌봄'이다. 주부를 잘하려고 하다 보면, 자신을 돌볼 겨를이 사라진다. 주어진 일을 적당히 쉬엄쉬엄 하기보단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겐 더 쉽다. 아껴가며 사랑하기보단 쏟아붓는 것이 제 맛이다. 나의 시선을 온통 가족들에게 쏟고 나니, 최저시급을 받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 15년이란 시간 동안 공들인 가족에게 성과와 칭찬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에게 희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 없다.
대문그림 출처: https://www.guetegemeinschaft-aupair.de/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