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화원이 일본 대사관을 들어가면서 더 이상 공짜 영화 관람과 책 대여는 불가하게 되어버렸다. 터덜터덜 나오니, 아니다 다를까 아들은 집에 가자고 한다. 그냥 집에 가기 섭섭해, 길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종로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곤 내게 하고픈 이야기를 아들에게 한다.
거지 같은 원장 밑에서 시급 만원 받고 일하느니 그만두고 싶지, 당장. 엄마도 그렇고 싶지, 아들아. 퇴직금도 없고 A형 독감 걸렸다고 해고 나오라고 하고, 통장 잔고가 5억 인 사람이 교실에서 쓰는 2천 원짜리 종이 문서함도 강사들 보고 내라고 하는 원장이야. 7시까지 근무인데 연락은 7시 넘어서만 오지. 주말에 카톡이며 전화는 기본이고 말이야. 나 성격 안 좋아요 선포하고는 초반부터 막 대하는 인간형을 엄마가 하루라도 더 대하기는 너무너무 싫단다.
그런데 말이야 아들아, 살면서 남은 어찌할 수 없더라고. 여기를 그만둔다고 해도 말이야, 이보다 더한 인간이 있지 말란 법은 없지. 엄마도 한때는 저 원장보다 더 피도 눈물도 없던 사람이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어떻게 바뀌었냐고? 많이 아프고 나더니 철들었지 뭐. 원장 인생에도 그런 날이 오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그 중은 다른 절에 가서는 아... 이전의 절이 더 좋았구나 할 수 도 있단다.
아빠가 엄마한테 월급으로 협박을 하더라. 빠득빠득 월급의 절반은 내 거라고 말해본들, 세상은 그리 보지 않고 있잖아. 그것을 아빠가 잘 증명해 보였지. 이미 엄마는 상처를 너무 크게 입었어. 아, 손에 돈을 쥐어야 하는구나. 단 한 푼이라도 내 손으로 벌어야 저런 소리 안 하겠구나 싶더라. 아빠 보다 더 많이 벌어오면 엄마한테 설설 기겠구나 싶기도 했어. 그래서 말이야, 엄마는 마음먹었어. 하루라도 일찍 집 밖으로 나서자고 말이야. 꾸준히 하면 세상에 내밀 경력이란 게 생길 거잖아. 1년만 다니자 싶다, 아들아. 1년이란 경력이 생기 나면, 그래도 지금 보단 더 씩씩해질 것 같아. 누구에게 어떤 일을 당한다고 해도, 아빠에게서 느낀 거보다 심한 배신감은 없을 거야.
아빠 덕에 엄마는 강해지려고 해. 사고무탁 고아처럼 외롭지만 씩씩해지려고 해. 사람 막 대하지만 명민하진 않은 원장이 좋아. 저렇게 하면 망하는구나 하는 예를 보여준달까? 저렇게 세상을 돈으로 바라보고 함께 하는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려고 하는 리더는 행복할 순 없다는 걸 매일 엄마에게 알려주지. 학원 끝나고 돌아오는 길엔 죽비 잔뜩 맞은 듯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든다. 다르게 살라고 매일매일 나를 일깨워주는 스승이야. 꼰대 원장님은 엄마의 스승이란다, 아들아.
한참을 이야기하니 과부하가 걸린 눈치다. 너에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싶다. 뭐 같은 세상에 이야기하는 엄마 덕분에 예방주사 맞은 아기처럼 세상에 대해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을까 걱정도 슬몃 된다. 어쩌겠니, 엄마를 통해서 네가 세상에 나온 걸. 내가 네 엄마로 정해진 것을 말이야.
" 얘기를 잘 들어주니까, 말이 술술 나온다."
" 엄마 닮아서 똑똑해서 그렇지."
아들이 해주는 엄마 칭찬이 달콤하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칭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