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유치원 3세 반을 개원했다.

by 호박씨

"염색했으니까 산에 안 갈래."

남편과 말을 나누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혼자서 씩씩 거리며 하던 염색을 해달라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할 수 있는 바는 혼자 하라고 보던 E-book으로 시선을 옮겼다. 룰루 밀러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면서 염색으로 그가 고군 분투하는 소리를 흘려보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각자 알아서 할 수 있는 바를 하고, 상대가 해주길 부탁했던 바는 기억하고 존중해 주길 바란다. 물론, 인간이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 법이다. 남자이니, 가장이니, 하나뿐인 아들이니 그를 둘러싼 이들이 남편에게 해줬던 대로 남편은 살아왔다. 주말 내내 내가 하고 있는 바는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는 길이다. 양보는 나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상대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건 선 넘은 짓이다.

" 엄마는 이기적이지."

남편이 딸아이를 바라보고 말한다. 이기적이란 말에 기쁘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나를 지켜가고 있는 중이구나 싶어 다행이다. 이기적으로 살려고 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좋다.




국제학교 부속 유치원 교실에서 처음 만나는 건 키가 낮은 옷걸이이다. 만 3세의 키에 맞는 붙박이 옷걸이엔 아이들이 벗어둔 외투들이 보인다. 가지런히 외투가 되니까진 1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3세 반, first step 반을 졸업하는 날까지도 멀쩡하게 옷을 걸지 못하는 아이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들에게나 외투를 벗어 거는 시도는 매일 아침 행해진다. 알파벳을 쓸 수 있는가 없는가, 알파벳을 어디까지 쓸 수 있는가에 대한 학습적 교육만이 교육이 아니다. 혀 짧은 소리를 하는 아이들에게, 지구별이란 세상에 나온 지 만 3년이 된 아이들에게 학교가 알려주는 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시도하라는 것이다. 비록 그들을 데려다주는 엄마는, 그들을 맞는 선생님은 1초면 외투를 받아 걸 수 있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너의 몫, 이만큼을 해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너다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 first step이 1년에 걸쳐 인식시키고자 하는 바다.

시간을 거슬러 바로잡고자 한다. 남편도 아이들도, 사랑과 관계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내 자리를 강요했다. 힘들어하는 거 보기 싫어 이 한 몸 바쳐 해냈던 일들은 그들에게 독이다. 나에게도 독이란 것은 말할 필요 없이 자명하다. 오늘부터 아들과 남편과 함께 하는 나의 Sweet home은 국제학교 유치원, 만 3세 반이다. 글로 기록하여 마음을 다잡어본다.






동생의 디저트 카페에 나가면서부터 빨래를 식구별로 분리해 각자의 방에 넣어주었다.

딸은 침대 옆 한편으로 밀어두었다가 옷장에 걸어두라고 한 번 이야기 하면 걸어둔다. 아들은 옷장 아래 처박아두었다가 한 소리를 듣는다. 구겨 밀어 넣어 두지 말라고 해도, 지속적으로 한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혼내도 한다. 단 한 번도 옷걸이에 걸어 반듯이 걸어둔 적이 없다. 얼르고 달래도 스타일대로 간다. 지금도 쌓여둔 아들의 옷을 보며 언제쯤이면 내 말을 걸어줄까 싶어 속이 탄다.

"빨래는 다 뭉개두면 구겨지잖아."

남편은 한 소리를 한다. 빨래를 걷어다가 개켜서 그의 침대에 올려둔다. 켜켜이 올려두니 다림질하지 않은 여름 면티셔츠는 다른 옷 밑에 깔려 구김이 더 간다. 바짝 말랐을 때, 종류별로 반듯하게 개켜 그의 옷장 안에 있었으면 좋겠나 보다.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해온 일이다.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마른빨래를 걷어 종류별로 나누는 과정까지는 하고 나머지 공정은 그에게 맡겼더니 투덜댄다. 공정을 맡겼다는 바에 죄책감도 느낀다. 내 일로 선 그어져 있던 일지만 가족이 할 수 있다면 하면 된다. 15년 해온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해온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의 진리는 변하는다는 것이다. 지구별을 여행하는 인간 주제에 영원하길 바란다면 그건 진리를 거스르는 바다. 1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며, 어제의 나 또한 오늘의 나와는 다르다. 결혼이라는 인연으로 그와 관계 맺음을 한 날로부터 우리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할 것이란 사실만큼은 영원하다.

부모와 자식 관계라고 다를까? 갓난아이 대하듯 그들을 대하지 말라 한다. 나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아이들이 스스로의 권리에 대해서 부르짖는다. 기말고사가 곧 다가오니, 계획표를 짜라고 금요일 저녁에 아들에게 일러주었다. 아들은 만 이틀만인 일요일 저녁 계획표를 구글 docs로 만들었다. 이틀 내내 아들은 왠지 이번 기말고사 잘 볼 거 같은 기분이 든다고 중얼거렸다. 못 봐도 결과는 나의 것이니 내가 책임지면 되는 게 아니냐고 한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젠 차갑게 물러나보자. 아이의 말은 틀린 것은 없다. 아들에게 한마디만 건네어 본다.

" 시험 잘 보고 싶냐?"

잘 보고 싶단다. 마음 나눌 친구 한 명 없이 만 3년을 지나고 있는 아들에겐 성적이 나름의 위안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학원비로 월 40만 원 쓰고 있는 부모 중에서 공부 꽤나 했다는 이의 지혜는 실험해 볼 만할 것 같다. 이건 선을 넘는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나 또한 오지랖으로 가득하게 40년을 살아왔으니 어디까지가 나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너의 영역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도 실험 중이다. 작은 일, 짧은 순간도 놓치지 않고 따지고 든다. 시간의 숨결을 낱낱이 느끼며 사는 중이다. 50이 더 가까워지는 이 순간조차도 나는 만 3세 반인 양 사는 중이다. 책 제목도 있지 않는가? '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대문사진: UnsplashAndre Tais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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