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공간에 지내는 이와 눈을 마주 치치 않고 지내는 시간이 거진 반년이 되어갔다. 무엇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게 만들었을까?
" 무슨 생각으로 살아?"
그가 내게 내미는 말은 구성지다. 또 혼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오해겠거니.... 눈높이를 맞추고 살고 있는 우리다.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만족시키려고 사는 중은 아니다.
함께한 15년을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편견으로 점철되는 시간 때문에 말로써 그 순간 행동의 의미를 전달하기는 더 어렵다. 편견이란, 그가 그의 가족들을 통해서 보는 렌즈다. 또는 내가 그에게 바라는 바라는 이름의 렌즈다.
아버지에게 바라는 점, 친정엄마에게 그리워하던 말을 그에게서 찾고 있다. 친정을 나서면서 나는 이런 모습의 가정을 꾸릴 게다라고 마음속에 꾸린 그림이 있다. 새로운 그림, 완벽한 가정을 꾸밀 거야라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구나. 나란 사람이 결혼에 임하는 자세는 이것이었구나 하는 사실 또한 살면서 발견하게 되었다.
여자 형제가 많은 남편은, 남편과의 애정이 돈독한 적 없던 엄마를 둔 남편이기에 그들을 통해 나를 들여다본다. 그들과 나는 완전히 다른 객체임이 당연하지만 남편은 긴 시간 동안 그들과 비슷한 누군가가 되라고 내 등 떠밀었다.
말이 없으면 글이 는다. 마음에 맺힌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소화해 내야 하는데 그것이 내겐 글이다.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문장이 떠오른다.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는 방법으로 쌓이는 감정들을 풀어내는 때도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 꾸역 먹던 때도 있었다. 세상에 뭔가를 내어둘 자신이 없으니 뭐라도 한다는 의미에서 먹고 보곤 했다.
'input'. 아웃풋이라곤 1도 없는 무결점의 인풋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바였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던가, 상대방의 요청이 무엇이건 " 네"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이 버릇을 버린 것은 아니다. 지우고 싶은 버릇이지만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을 테다. 그러니 내겐 내일이 또 주어지고 주어진다.
글로는 일치감치 적어 내려 간 마음들이 쌓여있다. 브런치에 블로그에 어떤 때는 카톡으로 쓰여내려 진다. 남들은 다 쉬워 보이는데, 왜 내게만 부부라는 관계가 어려울까 싶어 포기하고 싶단 마음이 솟아오르면 글로 써 내려갔다. 헤어져야지, 이혼해야지. 입에 담기 무서운 말이 포기고 이혼이라 쓰면서도 두근두근....
말로 뱉으면 기억 안 난다 오리발 내미면 그만이다. ( 그러니, 요 근래 내가 아르바이트 나가는 학원 원장님은 ' 음성녹음 했죠?' 라며 내용 증명을 단단히 못 박아둔다. 세상엔 이런 인간도 있구나 한다.) 주워 담을 수 없지만,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사람의 피부로 흡수된다. 내게 말이 어렵다. 세상 어딘가에 내 말이 녹음되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하늘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우주선 모양의 녹음기를 머리에 이고 산다. 그러니,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조심스럽다. 뱉지 않고서는 못 배길 때까지 견디고 참을 수 있을 있는 데까지 참아본다. 말을 많이 한 날은 내내 불안해한다. 사람을 마주하기보단, 필터나 매개가 있으면 좋겠다 싶다. 내겐 전화보단 스크린이 편하고, 백화점보단 온라인 쇼핑이 아늑하다.
" 포기하고 싶어. 이제 그만할래."
이제야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하는 갈등을 맞닥뜨릴 자신이 없어 이혼을 선언했다. 이전엔 나를 포기하고 싶었고, 이젠 그를 포기하고 싶다. 그만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용기가 내겐 생겼다. 내뱉고 나니 후련했다. 이혼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 기뻤다고 하면 참말이다.
'말대로 이루어지니 긍정적인 말을 하고 삽시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 중엔 사실 칭찬과 긍정은 드물다. 남편의 말을 듣고 동감한다.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들어주고 끄덕거린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푸시는 가족들에겐 인기가 없다. 해결방안이 바로바로 떠올라 그들에게 선물처럼 내밀면 말을 더 듣지 않고 달아나버린다.
그만 좀 하라고.... 학교와 직장에서 생기는 관계의 문제들은 오늘로 끝나는 점이 아니라, 무수히 깔린 바닷가 모래와 같아서 내일도 모레도 계속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동감, 들어주기다. 'input', 들어주기. 얼마나 더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가? 어디까지 그들의 요구에 응해야 하지? 밤새 울고 겨우 나를 달래 잠든 날이었다. 이혼한다고 외쳤으니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말을 뱉었으면 실행에 옮겨야 하는데, 골치 아픈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반나절이 지났을까? 출근하고 나면 하루 종일 전화가 없는 남편이 점심 먹었냐며 전화를 걸어왔다. 밥 먹었냐고 묻는 그의 말속엔 어제 내가 던진 그 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신기한 일이다. 고대문자 해독하는 암호 전문가는 이런 기분이었을 거야. 굳은 어깨가 스르르 풀림을 느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배우자를 선택한 누군가를 칭찬한다. 기꺼이 리스크를 감행하는 당신을 안아주고 싶다.
결혼 정보회사 광고를 보면 당신과 비슷한 사람과 매칭해 주겠다고 꼬드긴다. 의대 선호도가 하늘을 찌르는 한국이다. 저출산으로 나라가 없어질 지경의 오늘 잔다르크보다 용감한 행동은 어떤 식의 리스크든 끌어안는 '나'이다. 나라를 구하는 일이 별게 아니다.
사고를 치고, 돌발행동을 하며, 남들은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당신이 미래를 만든다. 있는 대로 있고, 살던 대로 살면 멸종한다. 부글부글 끓는 카오스의 바다에서 생명이 탄생하듯 나는 매일 나와는 너무도 다른 남편에게 들이댄다. 그 덕에 깨지고 박살 나는데 죽진 않는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 싶은 순간이 오지만, 멀쩡히 살아 키보드를 누르고 있지 않는가?
뭐든 의미 지어지는 대로 이름표가 붙는다. 나라를 구할 상황은 아니라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 용기는 아직 없어서 내게 주어진 하루라도 위험하게 살아보려 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듯이 말이다.
넘어질 각오를 하고 한발 한발 내딛는 아기였다. 우리 모두 그렇했다. 주저앉을 줄 알면서도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들도 딸도 몸을 뒤집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하더라. 처음엔 조금씩 허리를 비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더 용감해져서 제 몸을 뒤집고는 주체할 수 없는 신남에 소리를 질러대던 때도 있었다. 뒤집기에 성공한 타이밍에 운이 좋으면 함께 할 수 있었다. 한 발짝을 걸어 나간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행운이 내겐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어떤 종류의 위험도 감수할 만큼 용감하다.
" 이혼해."
이 말을 또 내뱉을 날이 올 것이다. 손을 후들거리며 남편에 대한 불만을 글로 토로하고도 모자라 그의 면전에 대고 말할 것이다. 한 번 했는데 두 번을 못할까. 나의 용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포기하겠다고 말하며 일어선다. 못하겠다고 징징거리며 해낸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어찌나 재밌는 삶인지! 말과 글을 수수께끼를 풀어내어가는 용감함이 내겐 자꾸 장착된다. 축복이다. 글 쓰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진: Unsplash의Will Du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