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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없는 여자는 위험하다.

by 호박씨

하나의 인연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누군가에 의해서 내 생명줄이 끊어지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서 살아 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기도 한다. 살고 죽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인연들이 얽혀있겠지만, 때론 단 하나의 사건과 단 한 명의 사람으로 순간이 결정되기도 한다.

변변한 친구가 없는 아이였다. 여자애들이 가지는 그 흔한 찐친, 단짝 친구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공부에 더 열을 올렸다. 친구가 없는 이유는 자발적인 선택에 의함이라고 설정하기 좋다. 성적 또한 내게 이용당한 게다. 사람을 마주하고, 내 속을 꺼내 보일 자신이 없으니 뇌를 공부의 시간에 사용하였다. 유형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답이 뻔히 보이는 시험만큼 안락하고 편안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사람에겐 상처 입어도, 책에겐 상처 입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에겐 오해를 사곤 했지만, 점수는 나를 오해하지 않았다. 그러니, 공부를 사랑할 수밖에, 친구 삼을 수밖에 없지.

아이는 자라 친구 없는 아줌마가 되었다. 살고 싶은 모양이 이게 아니다 싶으면, 주변 관계부터 정리했다. 어디 있든 나를 설명하는 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영어 유치원, 학원 보내지 않고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데 뜻에 응하는 이를 찾지 못하니 혼자 나아갔다. 엄마로 사는데 골몰하고, 아이들 친구 만들어 주려고 그 얘들 엄마를 만나곤 했는데 그 관계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얘들에게 맞추는 방향이었다.





"대표님!"

가끔 그녀가 밖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표라고 불러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나를 포함한 7명의 같은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모여 만든 독서 동아리 대표다. 아파트 이웃이며 한동네 주민들이다.

그들과의 첫 만남은 줌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무도 대표를 하려 하지 않아 회의는 늘어지고 있었다. 공황장애로터 출발한 신경쇠약으로 온라인 회의조차 오래 앉아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빨리 끝내고 한숨 누워 자고 싶은데....

" 제가 하겠습니다. 대신 제가 치료 중이라 오프라인 모임에 혹시 못 나갈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렇게 얼떨결에 하게 된 대표라 동네에서 마주치면 멀리 서라도 낭랑하게 '대표님'이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매번 민망해한다. 언젠간 그녀에게 어쩌다 대표를 하게 되었는지 말해줘야겠다고 때마다 마음먹지만 여적 고백하지 못했다. 대표 말고 호박씨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싶은데, 내겐 너무 소중한 친구라 그런 제안마저도 조심스럽다. 친구야,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대표라는 직함이 부끄러운 건 내가 감당할 일이지. 배시시 미소를 띠운 내가 그녀 앞에 선다. 말로 뱉지 않았을 뿐 늘 이런 마음이다.

그녀에게 말을 걸게 된 계기 또한 부끄럽긴 마찬가지. 프리랜서로 초등학교에 독서교사로 일하는 그녀의 일이 부러워 보였다. 내게 딱이다. 불안 불안해 보이는 우리 얘들 학교 끝나는 시간에 퇴근할 수 있고, 주변 초등학교로 가니 운전이 필요 없다. '책'선생님이라고 하니 내겐 친근하다. 책만큼 내게 무해한 것이 또 있을까?

첫 독서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하며, 그녀가 하는 일을 알게 되었고 두 번째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렇고 보니 우린 아파트 입구 상가 의자에 앉아 1시간을 이야기 나눴다. 커피도 한 잔 안 사면서 그녀에게 구직청탁을 한 셈이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우리의 이야기는 어느새 양육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별난 엄마로 여겼는데 아이들이 어떤 사교육도 받지 않는 중이어서였다. 사교육의 성지인 데다, 고소득자가 모여 살아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동네에서 그녀는 보기 드문 존재이다. 나아가면서도 불안해하고, 키우고 있으면서도 반성하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어디 있다가 나타났어, 친구야?

드디어, 찾았다. 친구!




친구 없이 혼자 지내다 사이코패스가 되고 자신을 증오하다 못해,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젊은이에 대한 뉴스가 충격적이다. 그런 뉴스를 접하면 나를 바라보고 아들 또한 살핀다. 더도 덜도 말고 딱 1명이 내겐 있는가?

아들의 시간 속에 아들 자신 말고 거울처럼 바라볼 타인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없다면 내가 그 자리를 꿰차고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곤 한다.

친구 없는 여자, 세상과 단절된 청소년. 단어에서 위험함의 냄새가 풀풀 난다. 모르는 이들에게 씹히기 좋은 사회적 위치다. 친구 없는 청소년이었던 나는 여전히 이상한 아줌마이며, 씹히거나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곤 했다. 그런 내게도 저 멀리서 ' 대표!!!! 님!' 하며 성큼성큼 손 흔들며 다가오는 늘씬하고 이쁘장한 친구가 한 명 생겼다.

아들의 겨울 방학은 날씨보다 혹독했다. 그리 춥지 않은 겨울이었는데 2022의 겨울은 내게 차고 길기만 하다. 학교 체육관 공사로 방학 돌봄 교실이 운영을 하지 않게 되자, 그녀가 당황스러워했다. 저렴하고 편리한 돌봄 교실에 이 동네 얘들은 거의 없다. 그녀의 두 아들이 알차게 이용하는 돌봄 교실이 방학 2달간 운영하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을 꺼내 들었다.

외로웠던 나는, 친구 없었던 내게 아들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친구가 없는 아들의 오늘이 내겐 기회다. 잘 걸렸다, 너. 친화력 없고 너보다 서른이나 많은 여자사람 나와 친구 맺자, 아들. 단 하나의 인연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겨울 방학을 맞았고 아들도 이런 마음이라면 무너지지 않겠지 싶었다.

" 베이비시터 하자."

7일 동안 아들에게 말했다. 8살, 10살의 어린 두 이웃은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차분히 서서히 상황을 전달했다. 나의 친구인 아들은 '네가 꼭 도와야 해' 하는 사정을 외면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일주일에 2번 4시간씩 아이들을 돌보고, 그녀는 빳빳한 만 원짜리를 봉투에 담아 아들에게 매번 건네주었다. 내 아이를 살리고 있는 중인데, 그녀가 돈을 주다니.....

살며 학교가 원망스럽고 개학이 싫은 때도 온다. 학교의 돌봄 교실 재개는 안타까움이었다. 아들은 베이비시터 직을 잃었고, 나는 친구 하나를 얻었다. 진짜 친구! 알프스 눈 녹은 물이 고인 맑은 호수 아래 자갈처럼 동글동글한 속이 보이는 그녀. 난 이제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다.

친구는 나보다 훨씬 어린데도, 스타일이 고전적이라 전자책도 온라인 글도 즐기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는 브런치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하지 않는다. 덕분에 그녀에 대해 그 어떤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지금이 좋다. 나의 유일한 친구는 여러모로 최고다.


사진: UnsplashCharlein Gra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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