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많이 간다. 먼저 감자를 찐다. 보통은 껍질을 수세미로 뽀득뽀득 문질러 껍질째 져 찐 감자를 만들지만, 고로케는 껍질을 벗겨 찐다. 귀찮아서.. 감자가 충분히 무를 때까지 찌는 동안, 속을 준비한다. 피자*에서 배달에 달려온 오이 피클, 독서모임 회원님이 주신 단단한 햇양파, 남편의 아침으로 냉장고에 늘 구비되어 있는 쫄깃한 구운 계란을 마늘 다지기에 넣고 잘게 다진다. 물이 나올 정도로 조그맣게는 아니고, 적당히.... 몇 cm 이런 거 따윈 없다. 눈으로 보면서 내 새끼손톱 절반 사이즈다 싶으면 다지기를 멈춘다. 뭐든 적당히다. 나의 요리는 게으른 자의 요리이기 때문이다.
고로케는 여름의 음식이다. 푹푹 찌는 여름만큼이나 고소해진 햇감자가 밋밋한 고로케 맛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찐 감자에 젓가락으로 찔러본다. 젓가락의 속도가 느려지지 않으면 충분히 익었다는 의미다. 국자로 부셔 넓게 펴둔다. 충분히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나는 또 다른 과정을 준비한다.
튀길 준비다. 계란을 풀어 소금 한 꼬집 넣는다. 결혼할 때 친정 엄마가 준 쟁반에 밀가루를 넓게 펼쳐둔다. 감자가 잘 구를 수 있게 얇게 넓게 펼쳐둬야 하지만 귀찮으니 오줌싸개 놀이처럼 모래산처럼 쌓아두고 만다. 그리고 빵가루. 딸이 있으면 벌써 달려와 빵가루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먹거나 내 눈치를 보며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을 테다. 이제 나보다 훌쩍 큰 아이를 주방에서 보긴 쉽지 않다.
이제 70%는 왔다. 당신이 생각하는 고로케의 사이즈를 정한다. 식은 감자와 다져둔 재료, 마요네즈와 후추, 소금을 넣은 고로케 소를 동글동글 손으로 굴린 후 납작하게 되도록 눌러준다. 너무 꾹 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충도 아니고, 이 또한 적당히다. 벌려둔 튀김옷들을 순서대로 입힌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튀기면 고로케 완성이다.
여름 음식인 고로케의 가장 난 코스라면 이 튀김의 온도다. 바삭한 고로케가 탄생하려면 기름의 온도가 높아야 한다. 손이 많이 간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땀이 많이 난다. 여름에 먹는 고로케는 맛이 없을 수 없다. 별 맛이 없다면 감자가 고소할 만큼 덥지 않거나, 당신이 충분한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될 만큼 냉방이 잘 되고, 통풍도 좋은 아름다운 주방을 가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글도 써지지 않고, 꼴 보기 싫은 학원 사직서도 제출했고, 남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지 2주가 된 오전, 텅 빈 집은 견디기 어렵다. 친정엄마를 부지런히 살게 한 것은 무능력한 아버지 덕분이었구나라고 깨닫는다. 엄마는 여유 있을 새가 없었다. 못하는 음식이 없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음식을 해주고 나의 친구들까지 불러 음식을 헤먹였다. 좁은 약국 뒤편에서 점심, 저녁을 해결했다. 타고난 체력이 약한 아버지는 엄마의 밥으로 약국을 끌고 나가셨을 것이다.
" 뭐 하고 살았나 몰라."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말은 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이었다. 나란 인간은 어찌나 뭐든 빠르단 말이야 싶다가도 원망이 밀려 올라왔다. 엄마는 늘 내게 멋짐이여야 하는데, 멘토쯤은 되어야 하는데 어쩜 한결 같이 내게 어찌 살아야 하나며 묻는 것일까?
이 맘 때쯤엔 엄만 어떻게 살았지를 되물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들을 키울수록 막막하고 자신 없어 요맘때쯤 우리 엄만 무엇을 하면서 살았더라 떠올려보곤 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나가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누명을 쓰고 회사를 쫓겨나다시피 한 아버지가 약국을 차릴 용기를 낸 건 전적으로 엄마 덕분이었다. 동생은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할머니 댁으로 들어간 우리 넷은 이제 각자 흩어졌다. 약국으로, 국민학교로, 중학교로.... 낯설고, 외롭고, 바쁜 시간이었다. 엄마의 부재는 작지 않았다. 엄마는 씩씩해졌고, 아빠는 사라졌다. 약국을 지키는 시간이 긴 만큼 아빠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엄마는 부재의 구멍을 메꾸려고 음식을 해댔다. 엄마가 없는 부엌엔 늘 엄마의 음식이 있었다.
작은 창이 있는 부엌도 없는 부엌도 있었다. 어찌어찌 상황에 맞춰 혼자 부동산일을 보고 집을 구한 엄마에게 주방 환경 따윈 배부른 투정이었다. 약국 카운터 안쪽으로 작은 방이든, 뒤편이든 어떤 공간만 있으면 음식을 할 수 있는 엄마였으니 아파트 부엌이야 어떻게 생겨도 엄마에겐 훌륭하니까.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나의 쓸모를 찾기 위해 나서고 있다. 학원도 알아보고,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경력 단절 해결 프로그램도 참여해 본다. 살고 싶으려면, 살아 있음을 느끼려면 생각 따윈 할 틈 없이 뭔가를 쏟아내야 한다 싶었다.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를 만들어내야 엄마처럼 허무한 노년을 맞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두려움이 밀려오는 만큼 집으로부터 내달음 쳤다.
그리고 텅 빈 주방을 마주하고 있다. 내게 공황장애가 왔던 계절도, 엄마에게 공황장애가 왔던 때도 여름이다. 태양이 뜨거워질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입맛이 사라진다. 먹고 싶지 않으면 살고 싶지 않다. 밥 할 맛이 나야 살고 싶고, 가족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살아있음 느낀다. 밥이 뭐라고...
오늘도 창 없는 주방에서 감자를 삶는다. 여름아, 올 테면 와바라. 지지 않으리라. 우울함과 무기력함이 밀려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만큼 쨍한 여름해가 오르면 고로케를 만든다. 일을 벌인다. 그리고 고맙다고 홀로 되뇐다. 엄마가 내게 준건 공황장애, 우울증이 아니다. 엄마가 보여준 뒷모습은 묵묵히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며 뚝뚝 땀 흘리던 주부였다. 갑작스러운 더위가 오면, 입맛 없어하는 우리를 위해 뭔가를 짜내던 대단한 요리사로 변신하던 젊고 기운 넘치던 엄마가 그리워진다.
내가 그리 살면 되지. 민망해서 전하지 못하는 말, "엄마 고로케는 진짜 맛있었어"와 "엄마, 고마워."를 하고야 말리라. 이 더위가 가시기 전에 반드시 친정엄마에게 전화하고 생뚱맞게 말하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