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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n 29. 2023

다 계획이 있구나.

"쌍꺼풀 수술 남편한테 허락 받았어요. 난 인생이 불쌍해서, 나를 위해서 돈 좀 쓸라구." 

도망가야겠다. 명색이 작가인데 따위의 생각은 지우자. 나라고 별 수 있겠는가? 월급 주는 이의 병든 마음을 안아주기엔 난 너무나 파트타임이다. 학원에 정이라곤 1도 없으며, 최저시급을 받고 일하고 있기에 냅다 사라질 예정이다. 


나이 50에 원장님 정도면 상위 1%다. 틈틈히 맞는 보톡스로 탄력있는 피부며 아이들을 키우지 않았기에 생활 노동에 물들지 않은 몸매가 한 몫한다. 그녀 인생의 어디쯤이 불쌍한지,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를 가련히 여기는지는 착한 어린이에게만 보이는 보물찾기다. 

비율제로 일하는 강사들이 학원 운영에 대해 제안을 하면, '이 학원은 내꺼야'라고 외친다. '한 달뒤부턴 출근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보라한다. 익히 스쳐 지나간 실장님들에 대해 그녀가 여전히도 씹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는 내게 사직의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면, 나로썬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역사 이래로, 아니다, 인간이란 종이 존재하면서부터 우리에게 제일 두려운 건 뒷담화가 아니겠는가? 

늘씬한 그녀가 모딜리아니의 그림처럼 축 처진 눈을 하고 오는 날은 잘나가는 변호사인 남편과 싸우고 온 날이다. 원장님의 쌍꺼풀 수술은 남편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남편을 겨우 겨우 맞추고 산다며 푸념하는 날이면 그녀에겐 이런 고민을 나눌 친구가 없겠다 싶다. 파트타이머인 나를 만난지 고작 2주 남짓에 그녀가 가정사와 속내를 보여주니 말이다. 



 

내겐 다 계획이 있다. 계획이 선명해질 수 있는 건 원장 덕분이다. 


조그맣고 부스러질 듯 얆은 '나'는 2달전 그녀와 면접을 보았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준 그녀는 은인이다. 인복이 많다는 건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뜻이다. 부서지고, 박살나다보면 정수만 남게 된다. 오로지 내 속에 반짝이는 것 하나, 삶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계 국제학교를 다니는 원장님 아들의 학교, 야구선수의 딸이라 몇년씩 다녀온 제주도의 국제학교, 유명 인사의 자녀들이 다니는 지척의 사립초등학교 앞에 무릎꿇었던 날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돈 없는 주제에 자식이 둘이나 되네 라는 생각 안했을리 없다. 이런 각오도 없이 이 동네에 들어온 나는 참으로 순진했었다. 


특성화고, 직업계고, 공고, 상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학교도 가지 않고, 누워만 있던 아들을 일으켜 지하철을 탔다. 아들과 함께 간 곳은 '**소프트웨어 고등학교'. 눈을 반짝이고 가만히 입학 상담을 듣던 아들이 여긴 괜찮겠다고 한다. 하는 만큼 힘든 만큼 인정 받을 수 있는 학교라면 기꺼이 다니겠다 했다. 

 아이의 마음을 일으켜 세워두고 내가 하게된 일이 바로 학원 데스크 실장이다. 수학 공부라는 재주넘기에 소질이 없거나 특출나지 못한 아이들이 키 높은 데스크를 지나쳐 교실로 들어간다. 

" 서울대 가는거야."

원장님이 아이들을 향해서 외친다. 지금 저 아이에게 필요한건 서울대라는 단어가 아닌데....들어서는 원생들을 살아 숨쉬는, 꿈꾸는 생명으로 바라보지 않고 수학 성적이나 수강료, 학원비로 바라본다면 가능한 외침이다. 


나의 계획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기'다. 돈과 학벌을 무서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꿍꿍이가 굳어진 것은 원장님 덕이다. 학원의 네 번째 지점을 열는 그녀는 천 만원짜리 그랜드 피아노를 아들 학교에 기부했지만, 학원에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욕을 날릴 수 있다. 잔고가 5억인 그녀의 입출금 통장 내역엔 그녀가 때운 끼니들이 나열되어있다. 저렴한 햄버거와 천원짜리 아메리카노로 연명하는 그녀의 삶과 원생들의 학원비 입금이 추상화처럼 얽힌 학원 계좌를 열어 보는 루틴은 내게 인생 수업과 다르지 않다. 원장님의 하루를, 한 달을 들여다볼 기회를 준다. (거래내역이 조회되는 시일까지 들여다보기가 가능하다! ) 두려움을 떨쳐내라고 삶이 자꾸 말한다. 어디까지 나를 용감하게 만들 생각인게냐? 삶에게 묻는다. 



  

 "일반고에 다닌다고 회사에 거짓말 하고 다녀야할 수도 있어." 

남편의 눈이 컴컴해진다. 괜찮다고 말한다. 대기업이란 곳이 어떤 데인지 뻔히 아는 나로썬 남편에게 아이의 진로를 특성화고로 정했다는 말을 하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내 계획의 일부가 되어준다. 가까운 데에서의 찬성은 하나면 든든하다.


" 누군가는 너를 보고 오해하거나, 무시할 수 있어, 아들아."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지만, 내 말에 눈빛이 흔들리진 않는다. 괜찮단다. 남이야 뭐라든 상관 없단다. 한국에 정이 없어, 한국에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고마워진다. 

오늘도 일을 한가득 담고온 얼굴을 하고 식탁에 앉은 남편과 게임하니라 10번 정도 불러야하는 아들, 그리고 나보다 더 예민하고 감수성 충만한 딸에게 저녁을 차려준다. 넷이 함께하는 저녁밥상이야말로 나의 계획이다. 이상한 원장을 만나게 되더라도 다시 이력서를 넣는다. 7시의 저녁 밥상을 내 손으로 차려낼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괜찮다. 내 경력은 ' 손수 저녁 밥상 차리고 가족들과 함께 나누기'인지라 단절된 적이 없다. 사회 경험은, 일은 내게 사이드 잡인 셈이다. 


이 글을 읽어주는 그대가 있기에 나의 꿍꿍이는 공고해진다. 

호박씨의 엉뚱한 계획을 읽어주는 단 한 명의 독자만 있다면, 저는 한 없이 씩씩해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UnsplashPrince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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