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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l 27. 2023

어린 사수의 생일

별명이 울보였다. 꺼떡 하면 울어대는 나의 감수성에 엄마는 찌푸린 얼굴을 하곤 했다. 쉽게 상황에 빠져들어 순간이 영원인 듯 느껴지면 눈물이 어느새 흐른다. 측은지심 또는 유약함, 그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드라마에 빠져들고, 만화책에 사죽을 못쓰며 스토리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공감능력은 아빠가 회사에서 내쫓기다 싶게 나오고 난 후로부턴 집안에선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홀로 달밤에 보는 주말의 명화는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다. 12시가 넘어 끝나는 텔레비전을 붙들고 쓰다듬어 주었다. 신통방통하기 그지없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 홀리듯이 빠져들었고 기쁨과 재미를 나눌 이가 없어 잠들기 쉽지 않았다. 

이런 내게 40년을 살고서야 도구가 생겼다. 내게 무엇이 필요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리 헛헛하였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주부라는 업으로 집으로 숨어 들어오기엔, 궁금한 게 많다. 많아도 보통 많은 게 아니다. 


오늘은 사수의 생일이었다. 올해부턴 만 나이로 새기 시작했으니, 그녀는 이제 고작 스물일곱이다. 늘 키보드 위를 날아다니는 그녀의 손가락에 바를 핸드크림을 고르니라 고민 고민 했다. 

 입사 셋째 날 마주 앉아 먹게 된 점심식사에서 자신의 생일 기념으로 친정 식구들 집들이를 하기로 했는데 메뉴가 고민이라며 아이스브레이킹을 시도했던 그녀가 곱기만 하다. 새롭게 마주한 이 젊음을 향한 넘치는 애정도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만 담아야 한다. 마음 같아선 애정하는 록시*의 핸드크림을 사주고 싶지만, 내년을 기약하는 맛도 있어야지.  미리 준비한 만원이 안 되는 꽃무늬 핸드크림에 그녀가 놀란다. 이제 난 더 이상 저렴한 화장품에 즐거워하지 않는데, 그녀는 고맙단다.

 영국 최고 파티세리에서 기술을 닦고 온 동생의 디저트 카페 창업을 도와줬던 바라, 원래도 까다로웠는데 디저트류에 대한 눈높이가 하늘을 찌른다. 동료 직원들이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생크림 고구마 케이크, 고전적인 메뉴를 골라 왔다. 입맛 버릴 것 같은데 싶었다. 웬걸! 8 등분하여 나눠 먹은 고구마 케이크는 맛있다. 절간처럼 조용한 사무실에서 그녀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 7명이 정확하게 같은 양으로 나눠 먹은 이 예스러운 빵집 케이크의 맛은 기가 막히다. 그러니, 런던 호텔의 애프터눈티를 즐기며 1인당 100유로 넘게 내고도 나오지 않았던 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 맛있네요! 케이크 누가 골라오셨어요? " 

대표의 친구이자 사수의 남편인 90년생 이사가 배시시 웃으며 묻는다.

" 호박씨 생일은 언제세요?" 

감동이다.


일터가 생기고 동료가 생기고 생일을 말해줘야 할 관계가 생길 거라곤 사실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인간형 수집가처럼 가족과 시댁, 친정이라는 혈연공동체를 탈출해 이리저리 사람들 구경을 다니며 글을 쓰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브런치 글꼭지로 브런치북, " 경단녀의 창업일기"를 쓰기 위해서 출근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선명하게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취업도, 글쓰기도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가족을 위해 15년을 나를 하얗게 지우고 살았으니, 이젠 총천연색으로 나를 그려내리라 마음먹었기에 경력단절여성이라는 이해하기 쉬운 이름을 달고 성수동에 도착했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면 아침이 쉬워진다.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내일이 불안해서 살기 싫은 날도 있었다. 흘러넘치는 불안함이 아이들을 물들일 까봐 두려워 나를 없애버리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돈 안 되는 글을 쓰고, 누가 읽을지 알 수 없는 글을 올린다. 아침마다 2호선에서 청춘들과 몸을 부딪히며 이동하고, 그들의 핸드폰 화면엔 무엇이 있는지 염탐한다. 관찰자처럼 구경꾼처럼 인생들을 바라보니 내겐 불안함이 사라졌다. 통장에 찍히는 월급 때문이 아니다. (5% 정도는 맞다고 치자.) 

늡다리 인턴쉽에는 사은품이 줄 줄이다. 뭐든 시작하면 가장 빠르다는 걸, 그래서 흘러가는 시간과 경주하든 내 달음 치지 말라고 삶이 내게 디밀어낸다. 


대문 사진: UnsplashGeert Pie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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