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글 쓸 권리

by 호박씨

공모전의 시간이다. 브런치 공모전에 대한 알람이 뜨던 2달 전 팝업을 보며 두근거림이 시작됐고, 매일 보니 두근 거림의 강도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팝업을 한참은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매일 읽고 있는 경제 신문에서는 '만추 문예'라고 마흔이 넘은 이들만이 공모가능한 공모전까지 펼쳐지고 있다. 박완서 선생님으로 시작하는 공모전 모집 공고에 심장이 나불댄다. 처음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게 해 준 이가 박완서 선생님이었으니 어딘가 카메라가 있어 나만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나를 향해 공고가 붙고, 나를 위해 자리가 깔려있는 것만 같아 뭐라고 하지 않으면 작가로서 직무유기이겠다 싶었다. 2가지 다 해보리라 마음먹었고, 그간에 써온 글들을 주말마다 시간을 정해두고 들여다보겠다 결심했었다.



"당신도 책 내 봐."

브런치도 블로그도 남편에겐 숨겨서 쓰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계속 글을 쓰고 있는 줄은 알고 있지만 구역 아빠에겐 고하지 않는 중이다. 키보드를 누르는 엄마의 모습은 애들에게 익숙하다. 글 쓰거나 드라마, 영화 삼매경에 빠진 순간은 얘들이 무엇을 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집중한다. 아이들이야 이런 나를 알고도 남으니 노트북을 열고 앉는 엄마를 내심 기다리고 있는 꿍꿍이다. 그들은 내 글보단 시간에 더 관심이 많아, 글을 읽지도 참견하지도 않는다.

남편은 극도로 노출을 싫어한다. 블로그로 시작한 글쓰기 여정에서 그는 나의 첫 열성 독자를 자처하였다. 본격적으로 글을 써대기 시작하면서 그의 이야기가 또는 그의 회사와 우리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스며 나오자 안티가 되어버렸다. 내려라, 올려라, 삭제해라 라는 그의 참견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브런치 작가가 꼭 되어야 했고, 비밀리에 이 글은 쓰이고 있는 중이다. 블로그도 새로 계정을 만들어 글을 업로드하고 있어 더 이상 그는 나의 블로그 이웃이 아니며 내 글의 독자가 아니다.

그런 그가 오늘은 내게 프로 이야기꾼이 되어보라 한다. 그는 글쓰기 활동과 작가 됨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른다.

" 여보는 남들 눈에 띄는 거 싫어하잖아. 내가 글을 쓰면 여보가 내 생활 대부분인데, 여보 이야기가 새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지."

" 그렇네, 그럼 책 내지 마."

내게 글과 책이 어떤 의미인지 그는 가늠하지 못하기에 쉽게 말한다. 작가로 살아본 경험도 글을 써 본 시간도 없는 그에겐 존재하지 않기에 대수롭지 않게 우린 드라이브 중에 가볍게 이런 대화를 나눈다.

멋스러운 상자 속에 든 초콜릿처럼 글들을 조심스레 담아낸다. 누군가에 대한 글을 쓰는 게 당연하다. 그 누군가에게 글을 공유하는 일도 가끔 있다. 공유하기에 백 번은 망설이는 것이 사실이다. 글의 히로인이 된 대상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 남편처럼 말이다.

얼굴 없는 누군가가 마음으로, 영혼으로 내 글을 읽고 함께 느끼며 동시대를 살아간다고 생각하기에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문단의 평 또는 누군가의 문하생 심지어는 국문학과 소속도 아닌 호박씨 기에 무슨 말이든 지껄이고, 뭐라고 쓴다고 해도 상관할 이가 없다 싶기에 내 글을 태어남이 가능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어느 누구도 아닌 오롯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순간에만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출 수 있다. 원고지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치 않은 순간을 맞닥뜨려 분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감이 올 것이라 믿는다.




남편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다 마음을 먹었다. 그래. 그 어느 공모전에도 내지 말자. 출간을 꿈꾸지도 말자. 사실 9월 내내 책으로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글 쓰기를 머뭇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매일 얼굴을 마주 하는 이들이나 지인, 친구, 동료들에 대해서 느끼는 바를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써내려 왔는데 이 콘텐츠를 내 입신에 쓴다 생각하니 글쓰기의 자유로움이 그만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작가들은 결국 소설가가 되고 시인이 되나 보다.

' 이 글을 전적으로 허구입니다.'

이 한 마디가 필요하다. 키보드 앞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허구라는 가면이 필요하며, 필명이라는 코스튬도 유용하다. 오늘의 글쓰기는 전적으로 나의 대나무밭이며 성토의 장인 지라 나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행위가 주변인들에겐 불편함일 수 있다. 글쓰기 행위를 하고 금 같은 나의 시간을 글쓰기에 들이 붙고 있는 나와 글을 읽는 이의 생각은 다른 것이 당연하다 싶다.

그러니, 소설을 쓸 수 있는 내공과 주변인들을 허구로 만들어 낼 능력이 될 때까지 내 글은 브런치에서 황야의 무법자 등뒤의 칼처럼 존재할 예정이다. 글에 등장하는 누군가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나를 말리지 말 것. 부디 말이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난 삶이 좋다. 생에 욕심과 집착이 강하다. 그러니 없었던 듯 있다가기엔 부조리함과 슬픔, 흥분과 희열로 이 세상은 가득하기에 읊조리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그대들을 읊조리고, 그대들 덕분에 존재하는 나를 남기며 살 것이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허난설헌이나 박완서 선생님처럼 기다리고 기다리어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의 외로움이 없이도 손가락만 까딱하면 이 글을 읽는 당신과 같은 독자의 눈 속으로 나의 창조물이 스며들 수 있다. 기꺼이 이 세상을 누리고, 거침없이 헤엄칠 예정이다. 공모전은 꿈도 꾸지 않을 예정이니, 호박씨의 히로인이 되더라도 놀라시지 말기를 빈다.

호박씨를 아는, 그리하여 나의 히로인이 될 누군가에게 부탁도 해본다. 당신이 글을 쓰길 빈다. 그것도 아주 꾸준히 멈추지 말고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무엇이든 남기길 빈다. 글을 써보니 알게 된다. 나란 존재가 얼마나 신성하고 아름다운지 하루살이처럼 없는 듯 사라짐은 참을 수가 없다. 내 글에 실릴 만큼 그대는 힘이 세다. 그대의 에너지는 파동으로 밀려 밀려와 내게 닿아 글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분노든 증오든 사랑이든, 어떤 종류의 파동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얼굴을 맞대고 함께 잣아낸 시간이 그저 없던 듯 사라짐을 반기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함께 글을 씁시다.

글로써 비난했던 이에겐 나만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글로써 칭송했던 이에겐 글의 히로인이 됨으로써의 경험에 대한 느낌도 생겨날 것이다. 같은 책을 바라보거나 한 드라마를 보는 가벼움에서 글을 창조해 내는 육중함과 든든함으로 관계 맺고 싶은 욕망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욕망은 감히 공모전 입상 따위에 비교할 수 없다. 분명 그러하다.


사진: Unsplashmasahiro miy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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