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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Oct 24. 2023

당신은 적응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나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다. 신입사원의 시간을 거쳐본 경험이 있는 남편까지 부재하는 상황이다. 남편의 이번 출장은 중국행이라 그다지 길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월요일인 중이다. 

 친정 엄마는 한 달 전부터 세탁기를 사야 한다고 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 외의 것을 구입할 땐 큰 딸을 시키는 것이 엄마의 룰이다. 그런 엄마의 룰을, 여적이 해왔던 바를 지켜나가야 하는 할 것만 같고 엄마도 그리    바라고 있으니 거진 10월 내내 아니 추석 연휴 전부터 엄마와의 대화 속엔 늘 세탁기가 존재했다. 통돌이가 아닌 드럼, 드럼이면 15킬로 아니면 그 이상을 결정하는 건 엄마였는데 지속적으로 진행상황을 나와 나눈다. 엄마가 세탁기를 현명하게 오르는 데에 나와의 대화, 아니 딸의 신경 씀은 필수요소다. 할인 혜택과 포인트, 그리고 남편의 대기업 복지 사이트와의 가격 비교까지 챙길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다. 

 작은 아이는 지난주 1년간을 이어온 피겨스케이트 초급 심사를 받았다. 1시간이 걸리는 의정부에 가서 S자를 그리며 1분 정도 심사받고, 후진으로 S자를 도는 간단한 테스트를 받았고 종이 한 장의 초급증을 받았다. 간단하다고 하면 딸에게 혼난다. 경기도 피겨협회가 발행하는데 승급 심사의 1단계인 데다 심사 시간이 짧다 보니 단순해 보이고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0분여의 심사 전 과정을 위해서 딸은 1년여를 얼음판 위에서의 시간을 짬 내기 위해 스케줄을 수없이 조절해야 했다. 심사 한 달 전엔 일주일에 6시간씩 테스트 종목을 연습했는데 중1로썬 학교 시험이나 입시도 아닌 스케이트에 그리 시간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옆에서 수행평가와 스케이트 연습을 병행하도록 컨디션을 살펴주고, 피겨 선생님과의 레슨 시간을 조율하고, 운전을 못하는 관계로 남편에게 롯데월드까지 새벽에 아이를 데려다 달라고 그와 아이를 깨우고 아침을 싸서 보내는 작업을 했다. 씨.... 누가 간단하다 했던가? 

 아이는 S자로 빙판 위를 누비고 남편은 신나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는 그 순간 내 손엔 '랑과 나의 사막'이 들려 있었다. 아이 사진도 찍고, 코치 사진도 찍고, 아이와 코치 사진도 찍고 하기엔 이야기 전개가 매력적이다. 책을 펼치면 로봇'고고'가 되어버리는 흡입력으로 딸의 촬영은 남편 전담이었다. 

큰 아이는 특성화고를 준비하고 있다. 아이 학교 3학년의 90%가 가는 일반고등학교를 간다면, 준비로 열을 올릴 일이 없겠지만 특성화고를 아이에게 소개하고 권한 것이 나이기에 바쁘다고 누구를 탓할 바도 되지 못한다. 코로나로, 한국 적응으로, 사춘기로 여러 가지 면에서 아이가 지나온 어두운 2년이라는 시간을 11월 말에 맞닥뜨릴 특성화고 면접에서 잘 포장해야 한다. 아이의 지난 시간은 거짓은 아니되 맥락을 지녀야 하기에 면접용 스크립트를 짜야한다. 큰 아이와 나의 협업이 긴요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동네 독서 모임의 대표를 맡은 지가 2년 차라, 2주에 한 번인 모임의 진행을 해야 한다. 이번 주가 모임이 있는 주라 미리 토론할 책을 구매하고, 배달해야 한다. 잊고 있다가 급하게 주문하는 바람에 모임 회원들이 자비로 책을 준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 학부모 모임이라, 동네 기반 동아리라 풀타임으로 일하는 엄마들로 구성돼있어 오전 10시에 모임이 시작이다. 갑자기 인턴이 되고, 정직원으로 계약을 하게 된 대표를 위해서 모임시간을 저녁으로 변경하기로 하였다.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예약하고, 회원들에게 공지를 해야 하는데, 사실 나는 몰라라하고 밀린 드라마 '연인'을 정주행 하고 싶다. '랑과 나의 사막'을 마무리하고 '쿼런틴'으로 넘어가고 싶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사무실 건물의 커피빈 구석에 자리 잡고 실컷 책이나 읽고 싶다.


  




 매일이란 같지가 않아 우린 사실 순간순간 모험과 선택, 적응의 과정을 거친다. 다만 모험의 정도와 적응의 난이도에 따라 동일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삶의 순간들을 느끼느냐 또는 느끼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3개월 전 나는 오늘 같은 일상을 맞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세상으로 나가야 할 이유와 취업의 목적에 대해서만 집중했을 뿐,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곤 준비하고 예견하지 않았다. 취업 소식을 들으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다. 워킹맘이 된다면 전업주부로써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겼다. 적응하는 데에 얼마나 걸릴 것인지 또는 적응의 과정이 험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까맣게 잊은 채 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안달복달을 했고 애를 썼으며 신경을 들이부었다. 

하루를 돌아보고, 현재의 내가 서있는 자리를 모니터링하는 유일한 시간이 글을 쓰는 시간이다. 브런치에 긴 글을 쓰지 못하는 날은 블로그에 간단하게나마 오늘 하루에 대한 체크 사항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얼마나 걸었는지, 가족들과 어떤 감정을 나누었는지, 신문을 읽음으로써 세상 돌아가는 속도는 쫓아가는지, 그리고 돈은 얼마나 썼는지 네 가지를 체크함으로써 나라는 역사를 남긴다. 남기지 못하고 자리에 누운 날은 화장실 가서 마무리하고 나오지 않은 듯 찜찜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만큼 바쁘다. 코로나 덕에 늘어진 한국 적응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두 아이들이 내가 없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키워둔 시간만큼 나의 사회적응은 미뤄졌기에, 이제야 사회화가 진행 중이다. 사회 적응의 한가운데에 있는 셈이기도 하다. 

바쁘고 신경 쓰는 점이 많아 뭔가 실수를 저지르고 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덮칠 때가 있다. 실수가 보이면 스스로를 비판하고 깎아내리기도 일수다. 집안일이건 회사일이건 가족들에게 내뱉은 말이건 진땀이 바짝 나는 일 자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실수 안 하고 살고 싶은 욕심이 크다. 그러니 적응하는 나, 삶에의 적응이라는 과정이 내겐 부담스럽다. 

그리하여, 마음을 고쳐 먹고 나를 안아주는 시간이 기록의 시간이다. 능력자라 맡은 일이 많고 나를 찾는 이가 많다고 감사하게 여기는 건 사실 나를 토닥여주는 생각은 아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무가 나를 덮치지 않게 조심히 무게추를 스스로에게 옮겨본다. 적응하고 있는 중이니 실수도 이해할 것이다. 그들이 나를 이해할 것이라는 예상의 시작엔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 관용이 먼저다. 내게 자기 전 5분의 시간을 내어 말을 걸어본다. 

" 모든 게 새롭지?"

"응."

"언제쯤 평온해지는 거야?"

"평온한 건 지루할 수도 있어."

" 이게 원하는 삶이야?"

"응. 맞아. 정확히 지금 이 순간이 만족스러운 순간이야."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조급증은 이제 저리 멀리 어딘가로 던져두고자 한다. 적응의 시간은 언제나 따뜻하고 소중하며 누구에게나 긴요함을 잘 안다. 특히 내게, 스스로에게 가혹한 조건을 내밀던 버릇을 아직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내겐 긴요하다.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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