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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Oct 07. 2023

노동에 대하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그렇게 3개월이 지나간다. 지난달 회사는 기존에 공짜로 지내던 스타트업 빌딩에서 나와야만 했고, 방배동으로 이사를 왔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마무리된 이사 덕에 긴 연휴 뒤의 새 사무실은 낯설고도 낯설다. 

쉽지 않은 새 사무실에서의 첫 주가 드디어 지나가니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사 가기 전처럼, 입사의 기쁨에 취해 출근 자체를 설레어하던 여름처럼 일하기엔 글러먹었다. 이미 시간은 흘렀고 모든 것은 낯설다. 그리하여 내겐 어색함을 위로할 시간이 필요하다. 어색함. 낯섦. 익숙지 않음. 가장 싫어하고도 남음직한 단어다. 장차 1년여는 더 낯설고 무척 어색하며, 내내 익숙하지 않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광고 사업 지원 업무에 잊어서는 , 어린 사수와 계속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녀와 나의 간극은 참으로 크다. 우리에겐 공통점 보단 차이점을 찾기 쉽고,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뽑았는지 알 수 없다. 대표가 결정하고 그녀는 그저 받아들였겠지 싶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기간 내내  이러할 것이란 생각이 밀려오면 출근하기가 싫어진다. 

경영 지원 업무는 혼자서 도맡아 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혼자 하니 재미는 있는데 하고 있자니 현타가 온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창조인데, 지원 업무는 대부분 정확성과 문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이가 즐길 법한 일이다. 물론 정돈된 거실 풍경과 말끔한 아이들 방처럼 논리 정연한 상태는 만족감을 준다. 하나 꿈꾸던 성격의 일이 아니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노동과 노동 사이의 새참, 바로 점심시간이다.  혼밥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질 않을 예정이다. 책을 반찬 삼고 혼밥을 하곤 한다. 이전 건물은 라운지가 넓고 쾌적하며 다른 회사 소속의 혼밥족들이 있어 나쁘지 않았다. 이사 온 새 사무실이 위치한 공유 오피스 건물은 방배동의 옛 건물이다 보니 이전 라운지 보다 좁다. 혼밥을 위한 오픈 부스는 화장실과 마주 보고 있다. 절대 공간 자체가 적다 보니 오픈 부스는 화장실 맞은편에 간신히 들어간 셈이다.

눈으로 보기엔 기차칸처럼 아늑하고 몸집이 작은 내게 들어가기 적당한 사이즈의 부스인데 문제는 화장실 내음이 새어난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스크린에서 눈을 띄자 마자라 노동에 쏠려 있는 신경이라 식욕은 바닥이다. 뜨겁지 않은 도시락, 식욕을 독려할 말상대가 없는 상황 때문에 냄새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러니 부스에서 밥 먹기 싫은 마음이 밀려온다.  



"긴 연휴 끝엔 서로 조심들 하지."

한 회사에서 일한 지가 20년을 채워가는 남편은 마치 회사를 가족공동체처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계절이 바뀌면 귀뚜라미가 울고, 잠자리가 눈에 띄 듯 반복되는 계절처럼 한 해를 읽어내리는 덕분에 그에겐 노동이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복의 힘은 관계에도 적용된다. 부럽다. 이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간과 끈질김이다. 그만두지 않고 한 가지를 일관되게 한다는 건 무섭기까지 하다. 

추석 전부터 남편은 퇴직연금과 연금저축 등의 금융 상품을 끈질기게 소개했다.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집중하고 혈연관계에 목 매이는 나와 달리 남편은 우리 부부의 노후에 대해 계획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를 혈연관계보다 더 진하게 여기는 그는 나의 경제활동이 시작되자 은퇴 자금 월 500만 원이라는 목표를 공유한다. 70세부터 월 450만 원 정도는 확보가 되니 50만 원을 더 받을 수 있게 지금부터 부지런히 월급을 모으란 이야기다. 

" 나 적당히 다니다 그만둘 건데?"

그는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고 숫자에 대해서 말한다. 이토록 나와는 다른 남편과 한 공간에서 지낸 시간이 20년을 향해가니 이젠 제법 그의 기분을 읽는다. 내 기분을 해 치치 않는 상태에서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여본다. 더듬더듬, 그리고 때론 간신히 말이다. 화장실 앞 부스에서의 혼밥과 어린 사수와의 소통 부재, 그리고 내키지 않는 타입의 업무,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인턴 3개월 안에 존재한다. 남편이 그리는 노후는 이들에 대한 견딤과 극복, 승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족들을 위한 노동의 성격은 사실 감정 노동에 99%다. 대부분의 집안일은 사실 자동화가 되어있고, 17년이나 하다 보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속도가 붙었다.  3개월 이전 나의 노동은 가족들과 한 공간에서 잘 지내기가 목표일 지경이었다. 혈연인데 버텨야 하고 부부인데 견뎌야 하는 감정 노동보다야 오늘의 내 앞에 닥친 타인과의 노동이 낫다. 게다가 돈도 받는다. 노후를 계획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주부 노동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주부, 집만을 지키며 가족만을 위해 존재하는 노동자가 내겐 맞지 않는다. 

이 작디작은 회사에서 승화를 현실로 만들어봐야겠다. 긴 연휴가 다음엔 덜 두려워지고, 연휴 뒤 마주하는 회사가 덜 무서워지는 호박씨가 될 예정이다. 가정보다야 뭔들 어렵겠는가? 주부보다 더 혹독할 리 없다. 내게 경력 이음은 노동에 대한 깨침이구나 싶다.


사진: Unsplashsayan N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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