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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Sep 27. 2023

이사하는 날은 선명해지는 나

오늘에서야 9명뿐인 회사 단톡방에 초대되었다. 업무시간에 쓰는 사내 메신저 단톡방이야 일찌감치 초대가 되어있었지만, 카카오톡 단톡방은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 나의 핸드폰 번호를 아는 이도 회사 대표뿐이었고, 대표의 번호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연인관계와 부부관계, 친구 관계로 이어진 이들이 절반이 넘는 이 작고 젊은 회사에서 관계의 밀도는 제각각이다. 

경력단절된 여성인 나는 그들과의 연배 차가 큰지라 일찌감치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바가 많지 않다.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찾고 싶어서 저들만 할 때의 나를 되돌아보지만, 사실 고통스럽기도 하고 공통점이 희박하기도 하다. 

 저들만 할 때 나의 업은 명문대생이 가기엔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대기업에 들어간 절친들이 빨갛게 ( L사) 그리고 파랗게 (S사) 그들을 물들이고 있을 때 내 눈에 그들은 야속하게만 비춰줬다. 주 5일 근무를 하지 않는 이는 나뿐이어서, 일찌감치 친구들이 모여서 놀고 있어도 별 말 하지 못했다. 한 달로 치면 신입사원 월급이 얼마나 차이 낫겠냐만은, 그들 목에 걸린 이름표와 그들이 출근하는 반듯하고 네모난 빌딩에 나만 발을 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내게 일이란 견뎌야 함과 동의어였다. 

 공짜로 서울시에서 후원을 받아 사용하던 스타트업 사무실에서 더 이상 지낼 수 없게 되어 공유 오피스로 이사를 하는 날이다. 어제는 짐을 싸고 오늘은 사무실이 위치한 공유 오피스 건물 4층으로 짐을 나르는 날이었다. 이삿짐을 싸기 전부터, 아니 이사가 발표난 한 달 전부터 대표는 이사비용을 아끼기 위해 셀프 이사를 해야 한다고 일러둔 바였다. 갱년기 아니 저질 체력의 호박씨는 인턴인지라 허리가 이 모양이란 말은 깊숙이 넣어둔 채 이사 일정과 이사와 관련된 일거리들을 처리하니라 바쁠 뿐이다. 

오후 3시, 아침부터 이어진 이삿짐 나르기가 드디어 끝나고, 컴퓨터가 설치되는 시간이 되어서야 대표의 얼굴이 풀어진다. 서른의 어린 사장은 긴장을 단단히 한 기색이 역력하다. 

" 옥상 구경 갑시다!"

우르르 옥상에 올라가 사진도 찍고 회사 단톡방에  "옥상 가서 한번 뜨자!" 며 장난 어린 사진도 올려본다. 그들을 따라 올라가려니 허리가 찌릿해온다. 오전에 짐 옮기니라 땀을 하도 많이 흘려댔더니, 어지럽기도 하다. 

카톡 단톡방에서 그들이 와글와글하는 소리만 들어도 나의 30대가 승화되는 기분이다. 

'세상엔 말이야, 그런 회사만 있는 건 아니란다.'

건물 옥상엔 왠지 서른 살의 내가 있을 것만 같다. 불합리한 회사 대표의 요구에 좌절하는 그때의 내가 옥상 한편에서 말보로 멘솔에 불을 붙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샘플실 사장의 부적절한 스킨십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내가 싫어 내일이라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10시부터 이사인데, 10시 30분으로 착각했다. 이삿짐 나르지 않으려고 30분을 늦게 간 것은 단연코 아니었는데 늦길 잘했다 싶을 지경이었다. 절반도 넘게 짐을 옮겨 둔 그들 덕분에 내가 옮긴 상자는 5개 정도였다. 문제는 땀이었다. 3년 전부터 땀이 나면 얼굴에 수포가 오르고 얼굴에만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샤워를 한 듯 머리가 다 젖었다. 짐은 그들이 거의 옮겼는데 땀은 나만 흘리고 있었다. 

" 호박씨님, 괜찮으시네요?"

30분이나 늦어 직원들 각각에게 사과를 한 게 고작 10분 전이었는데 비 오듯 땀을 쏟는 갱년기 여성이 나로구나. 조그만 회사로의 경력 이음을 통해서 스스로가 이렇게 선명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들과는 참으로 다른 시간을 걷고 있다.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있지만 그들과는 참으로 다르다. 이삿날은 짜장면이지 하며 시킨 배달음식은 까달스러워진 입맛에 맞지 않으며, 짜장면의 단무지처럼 점심 식사자리의 반찬으로 등장한  TV 나 영화도 나로선 내용을 알 수 없다. 흘깃 봤지만 맞지 않아 넘겼던  연예 리얼리티를 사수와 디자이너는 부지런히 챙겨보고 있었다. 

 이리도 다른 이들 속에서 내가 자꾸자꾸 보인다. 그들이 맞장구 쳐줄 수 없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자신이 선명해지는 이 경험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주변에 함몰되지 않으며 외롭지만 나로서 살아가는 시간은 소중하다. 또한, 그들과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보면 드물게 말이 맞는 순간이 오는데 희귀한 순간인지라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서른의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모두가 가는 길을 가보지 못함 이였을 게다. 다들 대기업에 다니고, 대기업에 다니는 남자친구를 만나며 강남 어딘가에 신혼집을 차리며 호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불안했다. 다른 이와 같은 꿈을 꾸지 않는 나는 벌거벗고 회사를 다니는 듯 이상하게 보일 것만 같았으니까. 

이런 불안함은 세월이 흘러 점점 더 커지더나 어느 순간 나를 잡아먹기까지 했다. 그러니 공황장애는 불안함의 콜록 거림인 증상일 뿐이었을 뿐 불안은 내 속에서 불치의 병 수준에 이르렀단 사실을 알고도 남는다. 갱년기의 땀 흘리고 여성이 허리를 부여잡고 이삿짐을 옮긴다면 그건 특별해지고 싶어서이다. 특별해지는 나를 이젠 기꺼이 받아들이며 남들과 전혀 동일하지 않음을 불안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의 담대함이 내겐 있다. 

나이 든 여성으로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 대담함이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으며, 앞으로 그러할 것이다.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를 사랑할 것이다. 누구에게든 꿰어 맞추는 삶은 여기까지였던 게다. 그리하여 오늘에서야 단톡방에 초대되어도 서러울 것도, 뿌듯할 것도 없다. 그들과, 세상 모두와 나는 느슨하고도 가는 거미줄 위에 함께 흔들리며 나아가는 존재들일뿐임을 안다. 4층까지 이삿짐을 옮기며 흘린 땀만큼이나 알고도 남는다. 


사진: UnsplashHosein Sedi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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