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박씨 Nov 01. 2023

식물의 소리를 듣는다는 건

"엄마가 삐졌나 봐. 전화는 안 드렸더니... 내 전화를 안 받아."

어머니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엄마라는 사명을 소명으로 욕심내는 나란 인간도 종국엔 내가 먼저다. 신경 써주고 사랑한 만큼 되돌려 받고 싶은 이기심은 부모가 되어서도 발현이 된다. 전 같았음 남편이 근심 어린 말투로 어머니를 신경 쓰면 기가 막혔다. 그렇게 어머니 눈치 보니라 전전긍긍할 바엔 나 좀 신경 쓰고 내 눈치도 보지 싶은 마음이 떠오르곤 했었다. 이젠 꽤나 여우다운 아내가 된 나는 - 이게 다 글쓰기 덕분이라며- 한 템포 쉬고 그에게 긍정의 한마디를 날려본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참말이다. 짧은 나의 긍정에 그가 하던 이야기를 멈춘다. 여우의 지혜를 갖추기 시작하는 나와 발맞춰 남편도 과거와는 다르게 여유가 있어 짧은 나의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그는 감지한다. 그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걱정된다를 토로할 뿐이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매일 퇴근하면 전화하던 아들의 전화가 어머니에겐 저녁 식사 후의 낙일테지. 그러니 출장에 면담에 정신없는 10월을 보낸 그가 전화하지 않은 시간 동안 어머니는 마음 상하셨을 수도 있고, 상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으실 수 있다. 지금의 나는 건강하고 멀쩡하고 돈도 벌기 시작하였으며 동료도 생겼고 가족들 저녁밥을 챙기기 부담스러울 만큼 빼곡한 하루를 보내고 있어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친정 엄마의 연락이 부담스럽다. 이런 나도 해운대의 너른 집을 홀로 지키고 계실 어머니처럼 아들에게 속상함을 호소하고 관심을 구하는 때가 올런지도 모른다. 



  

 식물들은 말이 없다. 그들이 내지르는 파동이 잊을진대, 그들이 세상을 향해 지르는 소리는 동물이고 유인원인 나의 귀엔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을 살피고 바라봄이 그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바라봄은 사랑이고 관찰이다. 바라봄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며, 인생을 대상에게 띠어주는 일이다. 1초 아니 0.1초라는 양의 인생을 바라보는 대상에게 내어주는 나눔의 행위다. 

 5년의 독일생활이 끝나고 지금의 집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공을 들인 것은 식집사가 되는 일이었다. 구축 아파트라 베란다가 너르고 전세라 너른 베란다를 확장하지도 못하니 베란다 공간은 식물을 위해 제격이다 싶었다. 돈 주고 식물을 사지 않고 친정의 식물들을 데리고 왔다. 화분째 들고 온 녀석도 있고, 가지를 심은 녀석도 있고, 분갈이처럼 일부를 띠어와 심은 산세베리아 같은 식물도 있었다. 아이들이 강아지를 키우자고 재촉하기에 그들의 몫으로 사준 미니 선인장도 있다. 

그들 중 60%는 건재하고 20%는 죽어가고 있으며 20%는 이미 생명을 다해 화분만 남아있다. 코로나로 집에 갇혀 있을 때엔 공황장애로 아파 그들을 살피기는커녕 그들을 바라볼 시간조차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녀석들은 연초 학원 데스크 아르바이트와 인턴쉽으로 모든 새로움과 맞닥뜨렸던 나의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지난주 주말이 되어서야, 정규직으로 전환 계약을 맺고 3개월이라는 적응의 시간이 지나고 서야 베란다에 존재하든 이 생명들 중에서 더는 생명이라 부를 수 없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걸 깨닫는다. 

나이 들어가며 엄마도 시어머니도 말수가 적어지신다. 그들은 말할 힘을 아끼는 듯해 보인다. 했던 말을 반복하거나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며 띄엄띄엄 기억을 더듬는 이야기만이라도 조금씩 한다. 그들이 자신 있어하는 분야에 이르러서야 몸을 움직이는 게 다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바라봄일 것이다. 

 시간을 들여 뭔가를 바라본다는 것만큼 애정 어린 행동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 종일 스크린을 보는 사무실 속 나의 젊은 동료들과 눈을 맞추기보단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업무 플랫폼인 노션에 업무 요청을 하는 게 익숙하다. 그럼에도 어쩌다 그들과 눈을 맞추게 되면 나를 한 공간에 잊게 허락해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슴이 채워진다. 메신저의 말들은 예의 바르지만 딱딱한 반면, 그들과 눈을 맞추는 순간 내 귀를 타고 들어오는 나의 목소리는 그들을 향한 애정으로 뜨끈해짐을 알 수 있다. 행여 그들에게 들킬까 수위 조절하기에 급급한 게 요새다. 

 요즘의 당신은 무엇을 지긋이 바라보나요?  손바닥만 하며 차디찬 유리 화면에서 삐져나오는 빛에 매혹되어 혹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거나, 누군가를 따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간의 지속이 5분도 안되시진 않는지? 

출퇴근시간엔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메신저로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육성으로 그들에게 건넨다. 부모님에게 전화할 땐 스피커 폰을 쓰지 않고, 귀에 핸드폰을 대고 주변을 바라보며 그들의 음성에 집중한다. 

내게 남은 식물은 총 10개다. 살아남은 선인장처럼 사이즈가 작은 화분은 사무실로 데려갈 셈이다. 넓지 않은 업무 책상이지만, 데리고만 간다면 매일 바라볼 시간이 5분은 확보될 것이다. 집에 남은 사이즈가 있는 식물들은 물 줄 시간을 정하고, 아이들과 물 줄 당번을 정해야겠다. 퇴근하고 난 30분을 그 무엇도 하지 못해 소파에 늘어져 핸드폰 스크린을 보는 시간 대신에 베란다라는 찬 공간을 메우고 있는 이 생명들에게 눈길을 쏟아보겠노라고 브런치에 약속도 해본다. 

나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어마어마하다. 무언가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신문 1면 정중앙 사진 속 검은 연기를 바라본다. 바라봄으로써, 의미가 생기고 내겐 힘이 생긴다. 가자지구 어느 아이의 눈물이 들리고, 비명이 쏟아져 나온다. 바라봄은 이렇게 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나도 그대도 부디 스크린에서 눈을 띠고 하늘 한 번 주변 한 번씩 돌아보는 일이 생명수처럼 긴요하게 필요하다. 세상은 소리 없는 소리로 가득하다. 



대문 사진 : AFP=연합뉴스자료사진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적응의 시간을 내어줄 수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