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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Nov 16. 2023

어그 신고 운동장 한 바퀴

"어그 유행했잖아요?"

아직 서른이 넘지 않은 디자이너와 점심을 먹으러 나선다. 사무실을 나서다 도로 사무실에 들어갔다 나온 그녀의 발엔 발목 주변에 하얀 눈꽃무늬가 수놓아진 빨간 띠가 눈에 박히는 어그가 장착되어 있다. 한눈에 그녀가 오늘 개시했구나 했다. 

"아, 제가 스물 쯤에 정말 유행했더랬죠."

"아뇨, 그때 말고 작년에요." 

분명 나의 스무 살에도 어그는 유행이었는고, 각양각색의 어그를 신고 다녔고 짝퉁도 많이 신었더랬는데 이젠 가품 어그나 비스끄리한 어느 것도 신은 이가 없이 하나 같이 정품이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온 기분이랄까? 시간은 직선으로 나아가고 나는 그 시간을 따라 매일 조금씩 발전하며 그래서 언젠간 딴 세상급의 인간이 될 것이라 여기며 살았다. 땡! 정답이 아니 것만 같다. 운동장을 달리듯 저 앞이 보이고 다시 이 자리로 뛰어 돌아올 것이며 다시 돌아왔을 때의 나는 이전 순간과는 또한 같지 않으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디자이너 아가씨는 말수가 적다. 조용히 마주 앉아 먹어도 그녀는 개념치 않아하는 편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천천히 먹는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뜨거운 돌솥밥 누룽지를 불어먹는 그녀를 가만 쳐다보며 무슨 말을 꺼내볼까 한다. 월급을 신발 사는데 탕진하던 20대 말의 내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 이야기를 꺼내면 밥 먹는 속도가 더 느려질 테니 내가 말하는 게 낫다. 그녀의 점심시간은 1시간 20분이지만 나의 점심시간은 1시간인 탓에 연신 시계를 보고 있기도 하는 터이다. 

"돈 모아야 하는데 어그 자꾸 사고 있고.. 참.. 흐흐흐"

젊었던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녀가 스스로를 나무라기 무안한 지 해사하게 웃는다. 그런 시절이 있었던 나였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하진 않다는 이야기까지 그녀에게 전해야 하는데, 그녀가 웃는 바람에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녀의 어그를 보고 득달같이 백화점으로 달려가 어그를 샀었을 내가 있었다. 호박씨가 아니던 시절, 엄마도 아내도 아니던 그때 그러했었다. 그녀와 똑같은 어그를 사면 쪽팔리니 살짝 다른, 또는 조금 더 예쁜 녀석으로 골라잡았을 테지. 

해외영업직이었지만, 해외 바이어가 오는 일은 한 달에 한 번이 안되었다. 내일 뭐 입고 출근할까 생각하고 빼입고 출근했지만, 고심했던 나의 패션을 봐줄 이는 매일 함께 하는 직원들이었다. 토요일 출근도 했으니, 주말에도 만나고 회식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을 보던 그들이 다였는데도, 멋스러운 신발이라도 신은 '나'로 보이고 싶었었나 보다. 함부로 하지 말라고, 또는 곱게 대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여기서 말단으로 이렇고 있는 나이지만 언젠간 신발에 달린 반짝이는 장식이나 어제 백화점에서 산 향수의 알싸한 향처럼 멋있게 될 거라고 외치고 싶었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이다.  출근과 퇴근이 같은 길인데 풍경은 완연히 다르고, 기분도 다르고, 몸상태도 다르다. 오르막인 탓이 아니라, 길 위의 내가 다른 탓이다. 같은 경험을 하여도 완전히 같은 시간, 정확히 같은 경험은 없다. 삶의 진리다. 

서른의 그들을 바라보며 매일이 내겐 신기한 경험이다. 같은 풍경인데 다르게 다가오듯 말이다. 분명 같은 길이다. 놀이터를 채우고 있는 작은 아이들은 아침엔 없었고, 아파트 단지 안 할머니들은 아침 시간엔 친구와 어딘가로 가기 위해 기다리거나,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나서 출근을 하니 큰 아이가 별 일 없이 학교에서 하루를 보내길 기도하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말을 걸 친구가 오늘은 새로 생겼으면 좋겠다고 절절히 바래어 본다. 돌아오는 길엔 요새 영어학원에서 5시간씩 보내는 작은 아이를 생각한다. 아침에 싸두고 나온 김밥은 먹고 학원에 간 건지 궁금하다. 

 어느덧 급경사 앞이다. 경사만 오르면 집이다. 몸이 천근 만근이라 이 월급 받겠다고 이 짓을 해야 하나 싶다가도 스스로를 나무란다. 퇴근길을 기다려왔다. 퇴근하고 싶었다. 무사히 출근했냐고 가볍게 인사하는 동료가 있길 바랐다. 집이 아니어도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공간 하나가, 책상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했다. 별 탈 없이 큰 사고 없이 일을 마치고 무겁지만 뿌듯한 어깨로 퇴근하고 싶었다.

"간절히 바라면 어떤 모습으로든 이루어진다고."

퇴근하고 돌아오니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아 멍하니 넷플릭스를 켜 요새 순위 1위인 드라마를 열었다. 초점을 풀고 바라보았는데 머리를 때리는 대사들이 자꾸 등장한다. 그냥 사는 게 아닌 요즘이다. 매일을 깨닫고 사는 오늘이라 드라마를 봐도 띵언들이 연달아 등장하기에 글을 쓰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을 만큼 놀라운 날들이다. 문장들이 흘러나오는 시간이다. 

 어그를 신고 운동장을 뛰어본다. 건너편이 보이고 내 뒤를 달아오는 이도 보이며, 저편에서 나와 비슷해 보이는 누군가도 눈에 띈다. 아! 나의 오늘은 누군가의 미래이기도 과거이기도 하다. 이렇니 글을 써야만 하는 호박씨다.    


사진: UnsplashIsabella Fis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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