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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Dec 12. 2023

지극히 이기적으로 살아온 건지

"20살 차이 나는 사람들하고 관계 실험 해보려고요." 

진심이었다. 살아온 만큼 아마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마흔의 뒷자락에서 살아온 모습과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간절했다. 이렇게 사는 거 맞냐고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보이지도 그 누군가는 삶이었을 것이다. 신일런지도 또는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견딜 수 없는 대상은 나 자신이니 말이다.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대는 나 때문에 미쳐가고 있었다. 

아주 작을 때, 내게 주어진 위인전기의 신사임당은 50권의 하드커버 속 인물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신사임당처럼 살면 책에 나오는구나. 사람보다 더 책을 사랑하는 내게 그녀의 인생은 따라 살면 되는 안내책자요, 설명서였다. 그런 신사임당은 아이 넷을 낳고 ( 넷보다 더 낳았을 런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 나이즈음에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지금의 내게 주어진 시간은 잉여의 시간이며 선물의 시간이다 싶었다. 아, 생각해 보니 불꽃같이 살다 간 유관순도 위인전기의 있었다. 이 청년의 삶을 2배로 천천히 돌리면 또한 지금의 나이 즈음일 것이니 여전히 내 앞에 놓인 시간은 나머지가 맞다. 

그렇다면, 혈연에 둘러싸여 살아온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결혼이라는 관계 또는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가 시간을 채우는 전부로 살기엔 난 너무도 받은 게 많다 싶다. 소명이란 게 있긴 한 건지, 소명이 당최 무엇인지 한낯 우주를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의 인간 신분으론 가늠하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 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칭찬을 구걸한다. 차려낸 저녁이 맛있냐고 몇 번이고 되묻는다. 이렇게 살아라 또는 여기는 치워라 등등의 잔소리를 가장한 가스라이팅도 자주 해댄다. 내 뜻대로 되는 건 오직 나뿐인데 가정이란 울타리에 갇혀있다 보면 가족들이 마치 내가 의도하는 데로 움직일 수 있다는 착각에 제대로 빠져버린다. 


 취업을 하게 되면서, 동네 독서모임의 대표일이 소홀하게 되었다. 전업 주부이거나 유연근무 또는 자영업을 하는 독서모임 구성원들이라 동네 도서관에서 오전에 열리는 독서회이기 때문이었다. 꼬박 2년을 만나고 보니 정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코로나의 중턱에서 시작한 모임이다 보니, 첫 1년은 구성원들 대부분에게 이 독서모임이 유일한 오프라인 모임였다. 지나고 보니 독서모임을 통해서 우린 코로나를 헤집고 나왔다며 서로 든든해한다.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으로 시작해서 우리들의 주제는 아이들이었다. 대화가 아이들의 사교육으로 흘러가려고 하면 방향을 틀곤 했었다. 보수적인 동네라 성적, 영어, 학원에 다들 열심인지라 틈만 나면 독서 모임은 아이들의 이야기가 주제로 자리 잡았다. 

가족처럼 그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고 규칙적으로 얼굴을 보다 보면 어느새 착각에 빠진다. 그들이 내 뜻대로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착각 말이다. 비슷한 나이대, 비슷한 살림과 생활반경, 가족이라고 부르기엔 적절한 조건이다. 내가 가족을 바라보던 방법을 그들에게 또한 적용할 수도 있다. 


20살 어린 이들과 하루에 6시간 넘게 한 사무실에서 지내다 보면, 나와 그들의 다른 점이 계속 보인다. 시작부터 그들이 내 생각대로 움직일 것이란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히 공통점을 발견해 맞장구 칠 일이 생기면 그리 즐거울 수가 없다. 기대하지 않는 관계, 바라지 않는 사이, 내겐 보석 같은 경험이다. 권태롭다 못해 지루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독서모임 발제문이 '아무튼, 친구'였다. 사무실 직원들 나잇대의 작가는 독서 회원들에게 잘근잘근 씹혔다. 그녀의 글은 박완서, 박경리 선생님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코멘트로 시작되어 작가 같은 친구 있으면 피곤하겠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자존감이 낮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삶에 동의할 수 없다고도 했다. 

책에 대한 나의 느낌과는 거리가 멀어 대표라 나름 모임을 이끌어 가야 하는데, 한마디도 띠기가 어려웠다. 일 때문에 피로도가 높아 2주간 책을 읽지 못하는 바람에 독서모임 하기 1시간 전에 그 책을 벼락치기하였는데, 1시간 내내 깔깔 댔기 때문이다. 전자책은 집중이 안 되는 편인데 ' 아무튼, 친구'는 예외의 경험을 내게 선사해 주었다. 이 책 덕분에 전자책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작가의 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작가가 철딱서니 없단다.  

스무 살 어린 이들과도 관계 맺음이 가능한지 실험 중이란 말을 한참 후에 조용히 꺼내보았다. 몇몇 회원들이 그들의 젊은 날 작가와 같은 시간도 있었다며 말하길래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내가 요새 겪는 이 신선한 시간들의 조각을 잘라내 말그릇에 담아보았다. 

" 많이 어린 이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실험 중이에요."

그때 그녀의 눈빛을 발견했다. 그녀만큼 독서모임을 아끼는 이도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몸져누운 다음날도 모임에 빠지지 않는 그녀다. 손수 해온 음식으로 저녁 독서모임을 빛내는 그녀다. 그녀는 이 모임을 가족처럼 여긴다. 그러니 그녀에게서 이 말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놀라울 게 없다. 

"아니, 왜 그런데 가서 실험을 해요? 우리랑 친구 해요."

목소리가 부드러워 그녀가 읽어주는 동화는 잘 빚은 도자기만 같다. 그 예쁜 목소리에 족쇄가 담겨있다. 많은 나이차, 다른 성별, 격차가 큰 경제상황, 이 모든 차이를 갖춘 관계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거절이 그녀의 목소리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지난 40여 년 간의 시간에서 나는 이런 이름으로 존재해 왔다. 딸, 엄마, 며느리, 배우자.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신경을 쓰며 그들에게 나의 시간을 나누어주면서 소명과 의미를 찾아왔다. 이기적이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삶인가? 분명 타자를 치고 있는 이 순간 나의 건재함은 가족만으론 절대 이룰 수 없다. 노트북을 밝히는 전기와 매끄러운 자판, 손가락이 곱지 않게 적절히 유지되는 집 안 온도 이 모든 것을 누가 내게 주었는지 알지 못한다. 전기를 공급한 이도, 노트북을 만든 이의 이름도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나 또한 이름 모를 누군가로 살아갈 것이다. 유명하고 알려져 모두의 칭송을 받는 이가 아니라, 공기처럼 존재함으로써 위대한 그런 이가 될 것이다. 기대하고 바라며 속박하는 존재로는 더 이상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진짜 이타란 이런 모습이라 믿는다. 


30분만 일찍 일어나면 점심 도시락을 쌀 수 있다. 어제저녁에 먹던 반찬과 아침에 갓 지은 밥이면 혼밥용 도시락으로는 손색이 없다. 오늘은 눈 떠보니 8시다. 눈곱만 띠고 나오니 출근은 제시간에 했는데, 사무실 앞에 이르니 출출하다. 지하철 구내 무인 가게에 2천 원짜리 김밥을 한 줄 집어왔다. 

나를 선택해 준 고마움에 제일 먼저 출근한다. 9시부터 10시 사이에 출근하는 유연 근무제라 젊은 동료들은 10시에 맞춰 출근하지만 난 9시를 맞춰 간다. 사무실 등을 켜고, 그들이 남긴 숨이 가득한 사무실을 환기시킨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만든 야채 김밥을 한 개 먹어 본다. 맛있다. 김밥을 만든 이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가 또는 그녀가 김밥을 만들었기에 30분을 더 잘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이타적인 인간이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쉽다. 나의 소명은 이타적인 인간이 되는 것 인지도 모른다. 오늘까지 살아본 봐로는 그리 추측하고 싶다. 위인전에 등장하지 않고도 이타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법을 깨달은 오늘의 나는 꽤나 멋진 것만 같고 무인가게에 놓인 야채김밥만큼이나 온기 있게 느껴진다.  


사진: UnsplashFilippo Faruff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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