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친구를 만든다는 게, 친구까지 되지 못하더라도 같은 말을 쓰지 않는 이와 시간을 공유하는 기회는 소중하다. 말그릇에 나를 담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뱉고 나서 후회하는 만큼 오롯이 나를 담아댈 수 있는 순간은 희열 그 자체다. 그래서, 비록 우리말을 하는 외국인일지언정 온전한 나를 전달했음을 깨닫는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이란 같은 언어를 구사하며 유사하게 생긴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더욱 완고해져 동물도 아닌 식물도 아닌 아집 자체가 되어버릴는지도 모른다. 독일 국제학교엔 국제결혼을 한 커플들이 많고, 인종과 언어를 넘나드는 모험을 기꺼이 감행한 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동양인으로의 문화배경을 가진 여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 커플을 찾아내기 쉬웠는데 그들을 바라보며 유독 난 씁쓸해했다. 나이와 성별, 언어를 초워할여 오해 없이 함께 하려면 누군가의 먼저 손내밈이 절실할 것이다. 아쉬운 이가 먼저 손을 내민다는 권력구조의 렌즈로 바라보면 여성이면서 동양인 문화를 가진 이의 양보라는 시작이 그들 관계의 처음이었을 거라 추측해 본다.
바깥세상으로 나온 지 만 3개월을 지나가는 오늘, 사무실 나의 동료들을 떠올려 보면 나와의 인간적 공통점을 찾기는 보통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는 그들과 공존하고 그들과의 교감에서 기쁨을 느낀다. 반면 집으로 돌아와 나와 닮은 아이, 나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자식, 나와 비슷하다는 착각으로 선택한 배우자 앞에서 좌절하곤 한다. 한국말에 나를 담았는데 어찌 소통이 안될까 싶고, 생각대로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길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으름이다. 관계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나만큼의 크기로 존재하는 엄연한 영혼인데, 내 것이라 여겨 쥐고 흔들려는 마음 때문이다. 글을 쓰며 종종 나를 들여다본다. 나 또한 내 것이 아님을 늘 깨닫으면서도 가족들 앞에선 적용이 되지 않는 순간이 그득하니 가까운 이가 두렵고 더 어렵다. 나만 이런 건 아니겠지?
내가 확장할 수 있는 데까진 어딜까 하고 의문을 던져봤던 바가 인도국적의 A 그녀였던 것 같다. 국제 학교 부모모임에 혼자 참석하면 사실 졸아서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눈치 보고 실수하면 어쩌나 하고 못 알아듣는 말이 나오면 당황하여 옆에 누구 하나 있으면 든든해졌다. 그날도 같이 갈 한국인 엄마를 찾아 나섰고, 사실 마뜩지 않았지만 내 마음 편하자고 그 한국인 엄마를 대동했더랬다.
우리 옆에 앉은 A는 혼자 왔음이 분명했다. 우주처럼 새카만 A의 피부와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눈동자가 신기했다.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혼자 왔는데 저리 튼실한 아우라를 뿜는 것도 신기하거니와 그녀의 색으로 나의 뇌리에 영원히 기억된 저 검정을 내내 눈으로 사진 찍고 뇌리에 새기고 있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나를 향하고 묻는다.
"안녕, 우리 애는 1반이야. 너는?"
말을 건네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와 닮은 점을 찾는다. 그녀가 좋다.
옥스퍼드 출신의 의사라서 좋은 게 아니다. 그녀는 한 번도 친구를 데리고 부모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다. 그녀의 얼굴엔 자기 연민을 찾을 수 없다. 그녀가 감정을 담아내는 말그릇은 한결 같이 평온하다.
A를 알면 알수록 그녀에게서 배울 점이 넘쳐났다. 같은 의사이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돌본다고 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깥생활을 하는 남편에 대한 그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집안일은 로봇청소기에게 시켰으며, 음식은 사 먹을 수 있으면 사 먹고 해야 한다 싶으면 했다. 그녀의 과거 또는 그녀의 학위에 대한 생각을 담은 음식이었다면, 전업주부 생활이었다면 그녀의 음식에선 그런 맛이 날 수 없었을 것이다. 집으로 A가 초대한 날 상다리가 부러질 듯 음식을 내온 A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 같이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내가 얼마나 그녀를 좋아하는지 그녀에게 표하고 싶은 바람이 솟아올랐고 현실로 이루어졌다.
컨테이너 이사하고 난 다음 날이었다. 기진맥진하여 집을 바라보니 한국으로 짐을 싸보네 텅 비어있다. 돌아갈 비행기를 탈 날까지는 2주가 남았다. 2주 동안 살 수 있을 만큼의 세간만 남긴 집은 공기로 차 있어 생경했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이 감정은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A에게서 전화가 왔다.
" 점심 먹자."
노곤하여 나가기 싫은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A를 더 볼 수 있는 날이 내게 얼마나 있을까? 사는 동안 우리가 마주하고 밥 먹을 날이 또 생길까 싶어 A에게 만나러는 가고 싶으나 차를 팔아서 없다고 하니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한다. 15분 뒤 그녀는 내 집 앞에 나타났고, 그녀가 사는 동네 Konighstein으로 데려가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100년 된 카페와 그녀가 종종 가는 샐러드 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그녀 2배 덩치의 독일인을 마주하는 유창한 독일어에 입이 벌어진다. 5년의 독일 생활 동안에 늘은 건 영어뿐이지만, 독일어를 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녀처럼 자연스럽게 구사하게 된다면 저렇게 의연해질 수 있겠구나 한다.
다시 집에 나를 내려준 그녀가 현관문 앞에 걸린 리스를 보고 예쁘다고 한다.
" 내 손으로 만들었지."
하며 걸린 리스를 내려 그녀 손에 쥐어줬다. 한사코 그녀가 뿌리친다. 트렁크에 넣어 한국에 가져가라 한다.
아니! 아니다! 아무리 존경하는 그녀지만, 내가 마음 담아 흠모하는 그녀지만 이 순간만은 내 뜻대로 해야겠다 싶다. 크리스마스가 되기도 훨씬 전 습하고 어두워지는 독일의 밤 시간을 담아 만든 리스는 그리하여 그녀에게 선물로 줄 수 있었다. 리스를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도, 이렇게도 선명하게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할 수 있으니 난 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녀를 위해서 만들었어도 모자랄 판이었던 게 당시의 마음이었다.
"A가 하는 말 잘 못 알아듣겠더라."
절친으로 인증했던 한국인 A가 대해 평가했다. A와의 소통이 안됬었는지 A의 발음을 탓한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쟤한텐 안 어울리는 거 같은데."
곁에서 노는 A의 딸 이름을 알려주자 한국인 C가 말한다. 왠지 금발 백 인 이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인다.
한 때는 나도 그들과 비슷한 상태의 깜냥이였던 때가 있었다. 낯설고 이질적인 대상들을 두려워하고 순간순간 내가 최고여야 하고 이기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삶을 이어갔던 나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고, 아프고 부러지고 깎여가는 동안 자꾸 삶이 내게 알려준다. 눈에 속지 말며, 경험에 속지 말며 과거의 나로 세상을 판단하지 말라 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을 깨닫으며 살라한다. 일방적으로 당신을 맞추지도, 당신을 욱여넣지 말길 빈다. 그대도 나도 이 순간 이 만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