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에는 대가가 따른다. 어떤 종류의 대가이든 치르게 된다. 나의 선함이 탄로 나서 상대의 질투를 받는 경우 상대의 호감이 떨어지는 희생이 따른다. 오늘의 양보는 잠이 오지 않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겨우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 뿐인데 고구마 뿌리를 끌어올린 듯 후폭풍이 딸려 올라올 때면 나란 인간은 어리석은 면이 있어하며 후회한다. 이미 늦었지만 말이다.
커피는 12시 이후엔 먹으면 안 된다. 더군다나 어제까지 고열에 몸살감기로 고생하였기에 다량의 카페인이 들어간 커피는 나흘째 참는 중이다. 신입사원이 들어왔고 대표 눈치가 같이 밥 먹으러 같으면 싶은 목소리다. 여느 때처럼 도시락을 싸왔고, 책상 구석에 놓인 가방 사이로 하늘색 보온 도시락 통이 보이기까지 하지만 도시락의 시선을 뿌리치고 냅다 점심 일행에 끼겠다고 했다. 메뉴도 듣지 않고 말이다. 완전히 떨치지 못한 감기를 무찌르고자 출근 전 아침 뜨겁게 달군 곰탕이 보온통 속에서 여전히 온기를 잃지 않았을 터이다. 아쉽지만, '점심 같이 드시러 가실 분!'이라는 외침 속에 담긴 호응에 대한 바람을 저버리지 못한다. 나이 먹어서일까? 아님, 주부의 생활로 내 몸에 익은 맞춰주기 습성 때문일까? 안되는데 하면서도 내 손은 이미 번쩍 '저요'를 외치고 있는 중이다.
양보란 단어는 예쁘다. 나의 12 지신인 '양'이 들어가고, 양이 들어가니 뭔가 보드라울 것 같다. 양보는 단어만으로도 이미 배려가 깃들어있다. 그래서 양보가 좋다. 양보를 좋아하는 마음이 대가를 계산하는 머리보다 날쌔고, 뜨겁다. 내겐 늘 그러하다.
점심 값만 양보하면 되는데 한 걸음 더 양보를 하게 된다. 그게 내 안에 존재하는 힘이 센 양보의 위력이다. 한번 배려 가득한 인간이 되었으니 사람이 일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시대였다면 낯선 객에게 게스트룸도 모자라 안방까지 내어주었을 인간이었을 테지.
"커피 드시러 가실 분?"
나의 입사 날도 대표가 점심을 사주고 커피를 사주었고, 대동한 개발팀 직원 2분은 각자의 점심값을 내었으며 커피는 대표가 샀었다. 함께 밥을 먹고 이 날의 식사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일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 이를 테면 가정대소사, 신변잡기를 나누며 관계는 돈독해진다. 신기하게도 일보다 일 사이사이의 찰나가 주는 따뜻함이 오래간다. 그러니, 버젓이 사무실엔 원두커피 머신이 있고 커피를 먹기엔 감기약이 여전히 복용하는 편이 낫고 다른 직원들보다 점심시간이 20분 짧은 나에겐 식후 커피를 사 먹는 건은 양보도 이만저만 양보가 아니다. ** 커피 먹으러 간다는 빌미로 따라나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식당 길 건너 카페인데 늘 대기가 많아 커피맛을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양보와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양의 배려는 유명 카페의 맛있는 커피 덕분에 잘 덮고 포장할 수 있다.
"평소에 궁금했는데, 잘 됐네요."
하며 50을 향해가는 호박씨는, 동료들보다 적게는 열 살 많게는 열다섯 살 많은 나는 발랄하게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이렇게 잠이 오지 않아 결국 키보드 앞에 앉았다. **커피를 건네어받은 시간은 오후 1시 정각이었고, 다 마시면 밤을 새울 것 같아 사무실 복귀 하자마자 옆 책상 동료에게 절반 넘게 덜어주었다. 그럼에도 이런다. 머릿속은 자정을 넘기니 환해지고, 눈을 감으면 거사가 한두 가지가 아닌 내일에 대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아들은 개의치 않아 한다.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아들이 내일 원서 접수를 할 고등학교를 진학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지난 3월이었다. 2학년 성적과 미인정 출결석을 딛고서라도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합격을 하려면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그 무슨 수는 엄마인 호박씨가 잘 알아봐야 하는 터이다. 독일 생활 5년과 코로나 2년 그리고 내내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시간 1년까지 합쳐져 아들은 절반 넘게 외국인이다. 아들의 심장은 독일에 두고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국의 정서는 물론이거니와 고입 전형 관련한 한자어 또한 아들에겐 외계어다. 관련 정보는 더하다. 어디서 어떤 정보를 찾아야 할 지에 대해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호박씨가 빠르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의 제안은 독서록이었다. 그 모든 지나간 기록들을 덮을 수 있는 훌륭한 면접의 키는 독서 목록이다. 이 키를 들은 것이 한 달 전이였으니, 아들의 독서목록은 10권을 채울 수 있을까 싶다. 한국어로도 출간되어있는 원서를 읽고, 한국어로 독서록을 작성하고, 과목 선생님께 제출하면 선생님은 생활기록부에 아들의 독서 기록을 남긴다.
최대한 부지런히 챙겨 어제까지 올린 독서록인데, 마지막에 읽은 책이 타격감이 가장 높은 책인데 그 책이 생활기록부에 빠져있다. 양보해야 하는 걸까? 서울대 필수 도서 목록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오름직한 리처드 도킨스의 문제작, ' 이기적인 유전자'이다.
생활기록부를 정정한다는 게 모르긴 몰라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 중학교, 아니 공교육의 문서 작업은 무시무시 할 테지. 겨우 특성화고 따위를 간다고 생활기록부 정정을 요구하면 뭐라고 할지 두렵기도 하다. 공고 고 가는 아이의 부모가 담임에게 부탁하는 요청은 공무원에게 무슨 영양가가 있을까 싶다.
양보할 수 있을까? 아이가 독서록에 올릴 마지막 책으로 자발적으로 들어 올린 책이 '이기적 유전자'였을 때의 기쁨은 나만의 것이다. 그 누구와도 나눌 필요도 배려할 필요도 없다. 아이가 스스로 집은 책은 호박씨가 아이 나이였을 때 즈음 읽었었다. 읽는 시간 내내 이 영국 교수와 소통한다는 지적 충만함에 들떴었던 기억으로 가득했던 책이다. 그 책을 원서로 읽겠다고 한다. 그 누구에게 뭐라 한마디 자랑할 필요가 없을 만큼 좋아서 아이에게 고마웠다.
하필, 이 책이 생활 기록부 목록에 빠진 건 이유가 있을 게다. 삶이 내게 양보의 의미를 알려주려고 한다. 그 책이 없이도 아이는 될 테니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메시지 일는지도 모른다. 양보하고 살았던 시간만큼이나 목소리를 내는 용기가 지금의 삶부터는 네게 꼭 필요하다는 뜻일까? 이 어떤 어려움이 앞으로 펼쳐지더라도, 이보다 더한 편견과 설움이 엄마 됨의 길 앞에 쏟아지더라도 단단해지라는 소리인가 보다.
내일이 한 발 한 발 다가온다. 하필 내일은 경력 단절 여성 우수사례로 서울 여성센터와 인터뷰를 하는 날이다. 엄마 말고 호박씨라는 사람, 경력을 이은 사람에겐 더 없는 용기가 필요한 날이다. 작은 아이는 무대에 서는 날이다. 아이가 섰던 무대 중에서는 가장 큰 무대다. 그러니 설레는 마음에 잠들지 못하는 작은 아이를 어서 자라고, 내일은 다 잘될 꺼라며 다독였다. 2023년 11월 24일은 이런 날이다. 양보하며 살아온 삶이라 이름이 지어져 있던 길에 다른 의미가 지워질 것만 같다. 진짜 원하는 것 말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걸어온 길인데 그게 맞는지 아닌지 두고 볼 일이다.
머리도 몇 개쯤, 몸도 두서너 개였으면 좋겠다. 잠은 안 오려나 보다. 카페인 앞에서 한 발 물러서는 양보는 오늘부로 진짜 그만이다. 맹세!
사진: Unsplash의Lance Re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