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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Nov 07. 2023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때 내게 도움을 청해왔던 말과 행동이 떠오른다. 누군가가 내게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할 때는 타인에게 내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만일 나와의 시간이 타인의 고통을 줄어들게 하거나, 걱정을 덜을 수 있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셈이다. 그게 누구이든 말이다. 

내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변화하는 데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만 같아서 조언하기가 두려워지는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준다는 건, 딴짓하지 않고 그 시간을 통째 잡은 물고기처럼 누군가의 상황에 몰입한다면 대가를 바라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그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 위대해진다든지 도움이 되는 만큼을 찾을 수 있어서 뿌듯함을 느낀다든지 하는 대가를 기대하게 된다. 이 전엔 그 즉시 해결되지 않아 무기력함을 느끼곤 했었다. 몇 개월 있다가 다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해서 만나보면 그 상태 그대로다. 그럼 도대체 왜 만나자고 한 거야? 되돌려 받는 것도 없는데 내 귀한 시간을 내어줄 이유가 없다 싶었다. 그래도 한 번 더, 그래도 또 한 번 더 사람이 언젠가는 바뀌겠지에 대한 기대보단 본전 생각이 나서 거듭 시간을 들여 보다 변함없이 한결 같이 곤란함에 빠진 상대를 한심하게 평가하곤 했다. 왜 나처럼 금세 변화 하지 않지? 왜 어려움에 맞서 집요하고 치열하게 파고들지 않는 거지? 이럴 거면 왜 내게 질문을 한 겐가? 금쪽같은 내 시간을 들인 상황이 헛수고가 되는 건 다 상대 때문이다, 순전히! 



 

 그리곤 내게로 돌아온다. 내게도 어려움이 밀려들고, 고통이 스며든다. 그럴 땐 생각한다. 어찌해야 할까?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려보고 웹 페이지도 살펴보고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누군가에게 카톡을 하기도 한다. 도움을 청한다. 도움을 청할 때 사실 난 사정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사실 상대가 어떤 액션을 취해주길 묻는 형태인데 도움을 청하다 보면 어느새 답이 나온다. 그럼 내 상황을 들은 그 상대가 거절을 한다고 해도 그 해결법을 해줄 뭔가 다른 방안을, 다른 누군가를 찾으면 되게 상황의 의미가 매듭지어진다. 도움을 청하는 행동만으로도, 도움을 청하기 위해 연락을 취하는 과정만으로도 사실 해결은 거의 된 셈이라 보면 된다. 그리하여 상대가 거절을 하더라고 흔쾌히 알겠다 답할 수 있다. 당황하지 않고 욕하지 않고 상대도 그럴만하니 그렇겠지라고 생각하며 지나간다. 

 절실해서,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고 나만 힘들다는 생각에 빠져있으면 도움을 청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절박하게 당신 아니면 안 된다고 도와달라고 하면 거절당하기 일쑤다. 타인은 이미 나의 고민을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곤란한지 깨닫는다. 그 순간 진심을 돕는 이는 진짜 인연이지만, 돕지 않는 이가 세상엔 훨씬 많다. 인연이란 그래서 귀한 것이다. 흔치 않기에, 내가 가장 어두운 순간에 나의 세상을 밝히는 이는 사는 내내 몇 번 만나기 힘드니 그야말로 삶의 해성 같은 존재라 하겠다. 아님 오로라? 100세의 절반을 향해가는 지금,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의 귀한 인연을 만났으니 이미 내 앞은 환한 대낮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웬만해선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완벽한 그녀가 나를 만나자 한다. 우연히 지나다 들렀다며, 가지러 갈 것이 있다며 또는 잠깐 짬이 나 생각나 커피 한 잔 하자 둘러댄다. 그녀도 도움을 청하는데 어색하다. 아님 그녀는 아직 온전히 도움을 청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의 사정을 솔직하고 진지하며 돌직구로 꺼내놓을 자신이 없어 딴소리를 해댄다. 그간 갈고닦은 촉으로 알 수 있다. 그녀의 어둠은 한창이다. 그러니, 그녀가 둘러대어도 난 다른 일 다 젖히고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한 시간을 통화했다. 취업이 되면서 누군가의 얼굴을 보는 짬을 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 데다 전화는 집중하고 감정선을 느끼기에 사실 좋은 매체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눈에 속지 않고 소리의 진동에서 그녀의 상태를 읽는다는 건 상황을 파악하기에 유용하다. 그러니 온 힘을 다 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내게 용감하다며 대화 주제를 내게 돌린다. 상황을 피하게 된다며 자신의 상황은 나에 비해 훨씬 힘들다고도 해본다. 이리저리 나처럼 할 수 없다고, 나와 같지 않다는 변명을 내게 하지만 사실 그녀는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책을 많이 읽는 그녀가 근래에 읽는 책들만으로도 이미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짐작하고 남지만, 요샌 퇴근하고 오면 지치는지라 짐짓 그녀가 내게 사정하지 말길 빌었는지도 모른다. 

바쁘냐고 묻는 그녀의 카톡에 답을 하지 않고 한참을 머뭇거린 건 그녀에게 집중하기 위한 시간을 내기 위해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실컷 듣고 나서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오늘은 성과가 없는 시간은 전혀 아니다. 

조언을 했던 이들에게 늘 성과가 없다고 여겼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날이다.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그들은 여전히도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들의 불행함은 카톡 대문창이나 인스타그램에선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즐겁기도 슬프기도 웃기도 울기도 하며 지내니 나린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그들의 과정을 평가하기란 무의미한 일이었다. 신이 있다면, 영원하고 지리멸렬하고 끊임이 없는 신의 시간에서 본다면 그들을 향한 나의 시간과 귀기울임은 그들이 이 어두움을 헤쳐가는 데에 한 조각 해성의 꼬리 같은 빛이었을 게다. 그렇게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들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이제야 안다. 상담이랍시고 해줘 놓고는 위대한 내가 되길 그 즉시 바라는 과욕을 부디 용서해 주길 그들에게 빈다. 

변명을 하자면 그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그들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었다. 나의 행복함을 그들과 공유하고 싶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기에 고래고래 기쁨의 원리와 요령을 나누고 싶었던 마음만은 진심이었고 진심이다. 그러니 그대의 상담 요청은 늘 환영이다. 


대문 사진: UnsplashŠimom Ca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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