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남편은 모임과 회식이 연달아 있다. 작은 아이는 학군지에서 내신이 안 나오는 고1 오빠를 둔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간다기에 아쉬움에 친구네 집에서 밤새 놀겠다고 나갔다. 배는 고프지 않고, 저녁밥 할 힘든 없을 만큼 어깨가 무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솥을 꺼내 가볍게 씻고 새 밥을 짓는다.
종일 쌀이라곤 한 톨도 먹지 않은 아들을 위해서다. 점심으로 어제 푹 고아둔 삼계탕을 보온도시락에 담아 가 양껏 먹은 나로선 이 시간까지도 든든하다. 큰 아이가 오늘 하루 중에 먹은 거라곤 고작 아침에 구워낸 독일식 바게트인 브로첸과 이마트 편의점에서 파는 1천 원짜리 보급형 컵라면이 다다. 가고 싶은 특성화고에 붙었던 2주 전엔 식욕이 어마어마했었다. 큰 아이 깜냥에서 식욕이 어마어마하다고 해봤자 피자 한 판 정도다. 1년 365일을 다이어터처럼 사는 아이라 뼈만 앙상하다. 아이의 마음이 피폐해지고 교감의 빈도가 떨어짐과 정비례하여 식욕은 감소했다. 한창 안 좋은 땐 하루에 1끼도 안 먹어 아이는 움직이도, 먹지도, 자지도 않았고 아이의 팔은 한 줌이 안되었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여전히 아이가 먹는 양에 전전긍긍한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만 하는 중이다.
"김치볶음밥 어때?"
"치즈?"
" 당연하지!"
아이가 한국 와서 먹는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다. 참치캔도 먹지, 치즈도 먹지, 참치김치볶음밥은 아이가 정상적으로 먹는 메뉴다. 비록 김치는 하나도 먹지 않고 잘 골라내어두지만 그 정도면 양호하다.
달군 팬에 버터를 녹이고 파를 볶고 있으니 작은 아이가 신난 얼굴로 나간다. 작은 아이는 얼마 전부터 나보다 커졌고, 긴 머리에 침낭을 들고나가는 뒷모습이 대학생 같다.
그 어느 것도 내가 작은 아이만 할 때 당연함에 해당되었던 것이 없다. 의사 부부의 딸인 친구와 부부가 해외여행 가버림으로써 비워주는 넓은 집, 그리고 그 친구네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할 생각에 들뜬 14살이라니 낯설기 짝이 없다.
돈을 벌게 된다면, 사회적인 인간이 된다면 대단히 다른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의연히 떨치고 일어나 경력 단절을 해결한 엄마를 보고 큰 아이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런 아이의 변화가 주변으로 뻗쳐나가 아이가 갑자기 인싸가 된다. 20대 퇴근하고 나면 당시의 남자친구였던 남편을 만나러 가기 바빴던 그날의 나로 돌아갈 줄 알았다. 밤새 놀 체력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내게 돌아올 것이라는 대단한 착각에 빠졌다.
연말이면 사회적인 인간이 되었으니 여기저기 약속을 잡고 밤을 즐길 것만 같았었는데, 이렇게 김치볶음밥 2인분을 볶아 외톨이 아들과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다.
드라마에 보면 이렇지 않던데!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서, 노래 분위기가 180도 전환되는 거다. 멋진 커리어 우먼, 워킹맘의 삶이란 연말 김치 볶음밥하고는 다른 느낌일 터인데 말이다. 보드라운 실내복을 걸쳐 입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힘이 내게 남은 체력의 전부라는 사실에 놀라고 또 놀란다. 나의 취업과는 상관없이 체력은 돌아오지 않으며 세월은 거슬러 흐르지 않는다. 아이의 인생은 나와는 별개로 아이만의 속도로 펼쳐질 예정이라 원하는 고등학교 합격 소식에 하루아침에 친구로 둘러싸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게 진짜 삶이다. 당연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대가 누리는 이 조각의 시간과 밥 한 숟가락, 웃음 한 줌은 누군가의 노력이다. 그건 당신 자신이 일궈냈을 수도 있지만 때론 다른 누군가의 피, 땀, 눈물로부터 출발해 당신에게 도착했을 수도 있다.
김치볶음밥을 한 그릇 가득 퍼 줬는데 양껏 먹는다. 나름 잘게 다졌다 자부했는데 평소처럼 잘게 자른 김치는 곱게 골라내둬었다. 아들의 오늘 하루 필요 열량을 채워준 이 김치볶음밥의 김치는 친정엄마표다. 지난가을, 아이와 한창 씨름하고 때때론 심장을 부여잡거나 울먹거리던 그때 엄마가 가져다주셨었다. 3개월을 꺼내 보지도 않아 김치냉장고에서 잘 익어버렸다.
아이가 먹지도 자지도 않을 땐, 울다 주변 사람 모두를 탓해보곤 했다. 왜 이렇게 힘든데 친정 엄마는 도와주질 않지? 묻지도 않는 걸까? 부모님에게 돈 달라고 해서 아이를 외국인 학교에 보내볼까? 부탁하기 힘든데 부모님이 알아서 먼저 준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남편은 일만 하고 아이의 안부는 왜 묻지를 않는 건지, 내 자식이기도 하지만 본인 자식은 아닌지, 도대체 뭘 하고 살길래 와이프의 안부도 챙기지 않는 인간인가 싶었다. 작은 아이는 친구가 많아도 티 내지 말고 오빠가 혼자 있을 시간에는 집에 맞춰 돌아올 시건이 없다 싶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나란 인간은 내가 먼저다. 수렁에 빠진 순간엔 그 누구도 알아서 도와주지 않냐며, 그들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긴다. 지구가 마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이 말이다. 고통은 언제나 누구에게든 불쑥불쑥 찾아오는 법인데, 막상 고통이 찾아오면 감히 내게 왔냐며 억울해한다.
당연히 내겐 고통과 시름이 찾아온다. 김치 냉장고를 늘 채우는 친정엄마는 언제 내 곁을 떠날지 한낱 인간인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엄마의 김치도 당연한 게 아님이 분명하다. 김치볶음밥은 당연하지 않다.
마땅히 내게 주어질 자유를 조심스레 꿈꿔본다. 내년 연말을 그려보는 거다. 회사가 번창해서 연말 상여가 나오고, 그 돈을 받아 혼자 제주로 일주일쯤 간다. 대학친구들이나 부모님을 제주도로 초대해서 잘 익은 와인 한잔과 맛있는 흑돼지 안주로 새해를 맞는다. 아들은 친구들이 넘쳐나, 그들과 여행가게 해달라고 졸라 남편에게 용돈을 타가고 도쿄로 씩씩하게 저들끼리 한해의 마지막을 즐기고 온다. 딸은 제주도로 데리고 가되 나의 옆 방에 자리 잡고 함께 데리고 간 친구 둘과 밤새 노는 소리가 내 방으로 들려온다.
잡지 같은 사진 한 장을 찍어서 별스타그램에 올린다. 캬!
당연하지 않은 삶을 꿈꾼다. 절간처럼 조용한 집에서 바짝 마른 아들과 마주 앉아 김치볶음밥을 먹는 12월의 어느 날에 나는 꿈을 꾼다. 자유와 고마움 그리고 삶을 생각하니 살 맛이 난다. 김치볶음밥이 이리 맛있을 줄누가 알았을까? 삶이 이렇게 궁금해질 줄이야 작년의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12월의 김치볶음밥만큼이나 삶은 재미있고, 감칠맛 나게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