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은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 겨울로 아이들과 사과 맛이 없다고 투덜거렸지만, 반면에 아이들에게 기후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생겼다. 왜 엄마는 전기를 아껴 쓰냐고, 물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또는 다른 집만큼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주지 않는다는 그들의 불평에 건넬 수 있는 카드가 한 장 생겼다.
" 이렇게 계속 따뜻한 거야? "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라는 말이 나오자 기쁨이 와구와구 솟아난다. 차가운 계절, 제철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경험이 그들에게 주어지다니 말이다.
때 아닌 겨울비가 연속인 날들이었다. 살던 대로 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거듭 알려주려고 한국의 겨울답지 않은 비가 계속 내린다. 아이들이 한국의 겨울이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어 기쁘고, 더불어 독일의 겨울이 고스란히 살아난 시간이라 또한 좋다.
독일의 습기 가득한 겨울은 공기 자체가 무겁다. 공기 속 수증기들이 온도를 이기지 못하고 뿌연 안개로 살갗에 부딪히면 뼛 속으로 추위가 스며든다. 축축한 겨울을 이기려면 공기와 맞닿은 피부가 없게 하면 된다. 독일에선 모자, 장갑, 방한 부츠가 필수다. 검은 진흙 숲에 산책을 다니다 보면 엄지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무겁고 차가운 독일표 겨울 공기를 올해 우리 가족을 찾아왔고, 우린 모여 앉을 시간만 있으면 독일의 겨울을 이야기한다. 눈을 맞추고 내게 그 시간들을 이야기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신난다. 신남 또한 솟아난다.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 강마르고 매서운 서울의 겨울 답지 않은 날씨가 신남을 부른다.
그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쓸 만큼 비가 오지도 않는 데다가, 우산 같은 공산품이 싸지도 않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산 대신에 방풍잠바처럼 스며드는 겨울 추위를 막는 데에 주의를 기울인다. 독일에서 내내 우산을 그리워했다고 거짓이 아니다.
우산은 공짜로 나눠주는 건데 싶었던 아줌마가 올리*영에 가서 투명우산을 샀다. 여전히 내 버릇 다른데 주지 못하고 제일 저렴한 걸 고른 탓이다.
"지금 쓰고 나가실 거면 택 잘라드릴까요?"
난 여전히도 한국의 서비스에 감탄한다. 어린 아르바이트생이 만원도 하지 않는 우산의 비닐을 벗겨주고, 택을 제거해 주면 기쁨이 흘러넘친다. 여긴 한국이지 싶다. 그래, 난 돌아온 지 꽤 되었다.
넘치는 기쁨으로 이미 가득한데, 매장을 나서며 우산을 펼치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제법 오는 비 덕분에 투명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광경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 앞을 보지 않고 자꾸 하늘을 보며 걷는다. 5시간 스크린을 쳐다보니라 뻣뻣해진 어깨와 목이 뻐근하게 존재를 알린다. 투명 우산 덕분이다. 우산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구경하고 싶어 절로 고개가 젖혀진다.
행복하다, 기쁘다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기분이 퍼져나간다. 물방울 바라보는 눈에서 목을 타고 심장까지 내려갔다가 우산을 든 손까지 번진다. 형용할 수 없는 이 순간에 이름을 붙여본다.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 최선을 다해서 순간을 오려내어 본다.
한 해가 저물어 가니 새해를 맞는다고,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본다고 한다. 22년의 이맘때쯤을 생각하면, 스쳐 지나가 나는 시간이 두려워 나를 찾아오는 세월도 무서웠다. 의미 지어지지 않고 먹어가는 나이가 공포스러웠다. 23년은 공포 퇴치의 해다. 내겐 기쁨을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되었기에 더 이상 시간도 나이도 세월도 무섭지 않다. 어떤 경험이든 의미를 달 수 있는 도구로 글쓰기도 얻었다.
어둠이 깔린다. 투명한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보이지 않지만, 더욱 반짝인다는 걸 안다. 보이지 않아도 소리에 집중하면 되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을 거라고, 내 귀를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내게 어떤 모습의 24년이 오더라도 오려낼 기쁨이 생길 것이란 사실을 안다.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서울 게 없다. 23년의 내게 가장 기쁜 일은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 ' 호박씨'가 되었다는 거겠지.
사진: Unsplash의Gage Wal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