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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an 02. 2024

새해엔 부디 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오.

 친구가 없는 아이를 위해, 친구가 많은 아이이더라도 대화를 하기 위해서 취향을 맞춘다. 친해지기 위해 이해하고 싶어서 어떻게든 나를 끼워 맞춰 보는 건 노력해 볼 수 있다. 강압적이지 않으면서 즐거움을 주는 대화를 나눌 시간을 만들 수만 있다면 춤이라도 출 수 있다. 

 어린 동료는 말수가 적은데 그녀도 딱 한 번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날을 기억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스트레스로만 다가오는 그녀의 언어가 나를 찔러대기에 그녀를 이해해하려고 노력해 본다. 예를 들면, 그녀가 말했던 OTT 프로그램을 본다든지 하는 방법을 시도해 보는 거다. 

 역시 그녀와 나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는 사실을 OTT의 10회가 넘는 에피소드 1을 끝내고서야 느꼈다. 꼭 가족이라 서라기 보단 가까이 있어도 죽이 잘 맞는 이가 있다. 큰 아이가 그렇다. 큰 아이의 취향은 기꺼이 함께 하고픈 마음이 불러일으켜지곤 한다. 아이가 한창 혼자일 땐, 아이의 유일한 친구인 유튜브가 자꾸 아이의 취향을 뒤흔들었다. 유튜브 하는 말이라면,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콘텐츠라면 친구 따라 강남이 아닌 친구 따라 화성까지도 갈 듯한 아이다. 그렇지. 큰 아이는 독일에서도 친구가 전부였다. 그런 아이가 3년이라는 시간을 꼬박 혼자가 마음이 저미어 온다. 그래서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지나치다 싶은 콘텐츠는 걸러주고, 재밌다 싶은 콘텐츠는 함께 수다 떨어주는 바로 그런 친구 말이다. 



'체인소맨'이 프로그램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아들이 성인 인증이 필요한 콘텐츠라 했다. 담긴 철학은 좋은 데인체를 절단하는 장면이 매 초마다 나오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드라마로 피가 나오는 장면은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아들이 애니메이션에서 그려지는 신체는 괜찮아하니 신기했다. 절대 안 된다고 했더니 두고두고 서러워한다. 친구로 믿었다는 소리일까? 몇 년이 지난 오늘도 체인소맨을 보지 못하게 한 엄마를 두고 뭐라 한다. 아이는 무엇이든 간에 응원해 주길 바란다. 그게 뭐든 간에 무조건 네가 하는 일은 찬성이라고 하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외롭다고 하고 있다. 

'체인소맨' 후에도 아이가 보는 프로그램들을 함께 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 드디어 하나 건졌다. ' 장송의 프리랜'. 음악도 그림톤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일본만화 특유의 가슴 집착씬도 거의 없다. 아들과 함께 보기에 민망하고, 맥락으로 불필요한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곤란했다. '프리렌'은 곤란한 장면도 없고, 내 마음에도 쏙 들었다. 

아이가 말없이 혼자인 시간이 길다 싶으면 '장송의 프리렌' 이야기를 꺼내며 아무 말이나 해댔다. '장송의 프리렌' 관련 노래도 틀어보고, 봤던 영상을 다시 보기도 하면서 우린 친구가 되어간다. 이해의 도구를 하나 더 장착하게 되었다. 서로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는 창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공통분모와 온전 감정을 함께하는 경험이 켜켜이 쌓여 밀도를 높여한다. 

비로소 우린 친구가 되는 것이다. 


  


  

 때론 공통분모를 찾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관계도 있다. 공통분모가 분명히 있는데 완연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분노가 솟아오른다. 기대와 배신, 바람들이 어우러지면서 관계를 뒤틀리게 되고 친구가 되긴 글러먹었다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야 하는 인연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마주 앉아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동료와 가족이 있다. 분노와 실망은 반드시 타인이라고 해서 높지만은 않다. 가족이라서 실망이 더 큰 경우도 내겐 종종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른 걸까 자괴감에 빠지면 가족의 경우가 훨씬 파괴적인 생각을 낳게 한다. 남편이 그럤고, 부모님이 그렇했고, 여동생이 그렇했다. 시댁 식구들 중에서도 정을 붙이려고 노력을 기울였던 이에게서 당한 좌절감은 나를 산산이 부수곤 했었다. 

 해가 바뀐다는 건 자판 왼쪽 노트북의 연도 숫자가 하나 더 늘었다는 의미일 뿐 그보다 더도 덜도 아니다. 새해가 밝았으니, 지나간 해를 정리하고 새 다짐을 해야겠다는 행위가 유치하게 느껴지는 연말이었다. 깨달음 때문이었으리라. 숫자란 숫자일 뿐,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기에 변화의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은 점이 아니라 선이며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4D 메타버스라서 막이 내리고 막이 오르지 않는다. 끊김 없이 이어지며 변화는 예고 없이 다가온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달력이 있기 때문이다. 2023년에서 2024년으로 숫자가 바뀐다고 해도 내겐 어제이고 고맙게도 새롭게 주어진 오늘이다. 

 아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새해를 방에서 뒹굴거리며 맞았다. 아들과 더 이상 볼  '장송의 프리렌'이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새해의 시작에서 내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순간이다. 아들과 나는 오해의 여지가 없어 이해의 순도가 높은 언어를 나눈다. 작위적으로 그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 더 이상 볼 프로그램이 없어 제대로 실망인 데다가 새로운 업로드를 위해 닷새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아쉽다. 

 1월 2일이거나 말거나 일거리를 쏟아내는 나의 어린 동료가 내민 날 선 언어에도 다치지 않는 한 해가 될 확률이 높아졌다. 큰 아이 덕분이다. 쉽지 않은 친구를 하나 만들어보면서 나도 뭔가 되는 인간인 걸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아이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붙어서 아이가 공부를 하기 시작해서 등의 이유가 아니다. 그대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다. 아이는 친구가 되었고 나를 친구로 여기고 시작했다. 그러니 아이가 합격을 했건 공부를 안하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23년에 내겐 서른 살이나 어린 친구가 생겼다. 그록 24년 스무 살 어린이를 친구로 만들리라 마음먹어본다. 더도 덜도 어렵지 않을 것이란 자신이 있다. 

 나는 내 삶을 사는 중이고, 우리 모두에겐 자신만의 시계가 있다. 그러니 1월 1일 뜨는 해에만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매일 나를 위해 세상을 밝혀주는 해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이가 나다. 그리하여 친구를 만들 자신도 생기는가 보다. 


대문 이미지 : 장송의 프리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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