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박씨 Mar 15. 2024

화이트 데이라는 특별함

징징대지  않아도 알아채주었다. 엄마가 온 마음을 다  해 내게 신경 쓰고 있다고 믿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울산으로 출장 간 김에 휴가를 내어 어머니를 뵈러 갔단다. 6시에 일어나 큰 아이 아침밥 차려내는 게 아직 몸에 붙지 않아 종일 머릿속이 뿌연데 남편이란 사람은 이런 내 상태를 알고 있는 걸까? 굳이 이 타이밍에 어머니를 모시고 포항에 물회 먹으러 왔다고 답장을 보내는 그는 아직 멀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싶다. 남편과 함께 산지가 15년이 지났고, 그를 안 지가 20년이 지났다. 친정에서 엄마와 함께 산 시간보다 그와 보내고 나면 그가 친정엄마보다 더 나를 잘 알지 않을까? 


남편은 나를 그의 많은 누나들 중 특히 큰 누나와 비슷하게 여긴다. 그렇게 미루어 짐작하면 리스크가 줄어든다. 그는 조심성이 많다. 비슷하게 묶어서 생각하고, 일어났던 일로 미래를 추측해 보길 좋아한다. 가정의 일에선 그러하다. 직관이나 감이 아니라, 경험을 믿는다. 누차 그에게 나는 그의 혈연이 아니라 거듭거듭 말하지만, 큰 누나가 앓았던 병을 내가 앓게 될까 봐 걱정하는 식의 사고를 종종 한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첫째 누나와 내가 같은 병을 앓게 될 거라니. 


 살면 살수록 나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하는 시간이 많은 만큼 그에 대한 기대도 줄어든다. 오히려 그의 말과 행동을 예상할 수 있게 되면 즐겁고 기쁘다. 말없이 내가 바라는 것을 그가 하길 바란다는 건 어처구니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예를 들면. 화이트 데이라서 주변에서 받은 선물을 카카오에 올린다. 40대들 중에선 여전히 카카오 프로필을 잘들 이용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굳이 3월 14일 날 카카오 친구 관리에 들어가고 싶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청소하듯 숨김 친구 관리에 들어가 연락을 하지 않는, 연락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삭제하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꽃과 여행, 달콤한 호텔 디저트가 많아 생각해 보니 화이트 데이이다. 

누가 누구에게 주든 상관없이, 남편은 옛사람이다. 결혼 전에도 그는 어떤 날도 챙기지 않았다. 혼자 챙기다 보면 언젠가는 그도 챙겨줄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더라. 

 괜찮다 하면서도 힘이 빠지는 그런 날이 있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구걸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도닥거리면서 타고난 외로움을 달래는 게 괜찮은 날이 있는가 하면, 오늘처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불을 켜고 들어가는 게 싫은 유난히 외롭다 싶은 날이 있다. 회사 대표가 신세계 백화점 라운지에 다녀왔는지 백화점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초콜릿을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전화주니 괜히 성질도 난다. 돈 주고 산 걸 나눠주던지, 라운지 다녀온 티를 내지 말던지 둘 중 한 가지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며 대표의 눈치 없음을 속으로 욕한다. 


꽃, 나도 참 좋아하는데. 꽃집도 하고 싶고, 꽃 사러 가는 것도 좋고, 꽃을 선물 주는 것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받는 게 제일 좋다. 이른 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 끝도 없이 펼쳐진 무지개떡 같은 튤립밭을 남편이 운전해 델타 줬을 때가 제일 좋았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어딘가에서 발견한 해바라기 밭을 발견했을 땐, 그가 해바라기밭을 사준 듯 기뻤다.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한참을 눈에 담으니 품 안에 들어오는 꽃다발 받은 기쁨과 비할 바가 못될 정도였다. 화이트 데이인데 그는 자기 엄마와 물회를 맛있게 먹고 있으며, 화이트 에이가 무슨 날인 줄도 모르고 있다. 꽃다발이건 사탕 한 알이건 받긴 글렀다. 


그리고 그에게 온 카톡. 어깨에서 팔려고 하길래 말렸던 반도체 공정 관련 주식을 팔았단다. 오늘이 머리인 거 같다며 선명한 빨간색의 수익률을 보여준다. 카톡 메시지엔 그의 기쁨이 느껴진다. 

" 맛있는 거 사줄게."

그는 이런 사람이다. 그의 월급을 모두 갖다 줌으로써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뒤에 붙은 0의 개수가 정성을 뜻한다고 여긴다. 주식 팔아서 번 돈으로 맛있는 거 좋은 거 사주겠다는 그에게 이 돈이면 튤립밭 밭데기도 하겠다고 답해볼까? 그가 화이트 데이 기념으로 해바라기 밭의 올해 수확량을 통으로 선물해 줬다 여겨야겠다. 

이렇게 여겨야 나도 외로움 덜 타고 살 수 있다. 시어머니 챙기는 효자라고 그 앞에 선 긋고 질투하고, 다른 집 남편들과 비교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 이게 스스로에게 더 낫다. 


화이트 데이인 줄 모르는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밖은 봄날이 오지만, 약국 실내는 한동안 싸늘할 예정이라 폭신한 조끼를 사서 보냈다. 

"아빠도 나이가 들어서 이젠 속상해하더라. 아빠 것도 보내주라."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엄마 조끼만 보내면 아빠가 속상해할 것이라 생각하는 우리 엄마 덕에 내내 남편은 마음에 안들 예정이고, 말 안 하면 눈치 차리지 못하는 그 때문에 외롭다 느낄 예정이다. 아빠 옷을 엄마가 철 따라 넘치게 잘 준비하면서도 엄마는 말 없는 아빠의 마음을 내게 말로 풀어낸다. 나도 엄마처럼 남편에게 익숙해져 가고 있을 것이다. 


사진: UnsplashBoston Public Library

매거진의 이전글 신발 구경으로 세상 구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