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을 나서면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선명해진다. 학교 밖을 나가는 순간, 느꼈던 그 생경한 세상의 시선처럼 말이다. 아프지 않았더라면, 큰 아이의 사춘기가 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가정 안에서 머무르면서 나만의 왕국 안에서 여왕처럼 살려고 했을 테다.
나만의 가정을 만들면, 남편과 아이들에게 소속감, 쉬운 말로 세상의 믿는 구석 하나를 만들어내는 셈이라고 의미 지었다. 취업을 하고 나니 16년, 그보다 더 전인 20년 전 나의 꿍꿍이는 내가 믿을 구석을 만들고자 하였음을 50을 앞둔 오늘에서 깨닫는다.
큰 아이가 떠난 학교에 작은 아이는 여적 다니고 있어, 학부모 총회나 공개 수업에 참여하면 같은 공간인데 다르게 느껴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게 느껴졌다.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작은 아이 교실로 들어가며 눈물이 솟았다. 꿈벅이며 딸의 자리를 찾아갔다. 내 등을 따르는 시선을 느끼면서 맨 앞 줄의 딸아이 자리에 앉았다. 딸의 자리는 창가 자리라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봄볕이 가득한 운동장과 화단이 보인다. 노란 산수유가 1등이다. 눈물이 다시 솟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큰 아이는 한 번도 이 학교가 자신의 학교라고 생각하며 다닌 적이 없다.
아이들의 중학교는 학년마다 체육복 색상이 다르다. 23년도에 입학한 작은 아이의 체육복은 어깨에 진회색이 들어가 있고, 21학년도에 입학한 큰 아이의 체육복은 민트색이 들어가 있다. 바탕은 네이비로 같지만 색상으로 된 학년표시로 몇 학년인지 알 수 있다. 작은 아이의 자리에서 내려다본 운동장에는 민트색 남자애들이 보이고, 큰 아이처럼 마른 아이 혼자 운동장에서 가로질러 간다. 저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다. 아들은 2주 전에 입학한 특성화고가 마치 자신의 고향인 냥 여기는 중이다.
"학교도 화학도 재밌어."
10시가 넘어 돌아오면 차려내는 밥상 앞에서 아들이 내뱉는 말에 눈물이 삐져나온다. 큰 아이 앞에서 울면 안 되는데 싶어 눈물을 눈물샘 속으로 욱여넣었다.
소속, 연대, 공동체. 나는 이 말에 목이 마르다. 명함, 이름, 자리에 연연한다. 누군가를 나를 끼워주기만 한다면야 뭐라도 꺼내놓을 셈이다. 입사해서 한동안 젊은 동료들이 예쁘고 안쓰러워 늘 먹을 것을 챙겨 다녔다. 3개월이 지나고 남편과 회사 이야기를 하다 눈물샘이 활짝 열릴 만큼 분한 때가 있었다. 남편의 이 말 때문이었다.
" 여보가 한동안 걔네들한테 감정 이입을 너무 하더라고."
그렇다. 남편이 정확하게 찌르니 아파서 눈물이 났다. 가족이고 싶은 마음, 남이 나와 같고 내 마음도 상대밤 마음과 같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한창 잘 나가는 대한민국에서, 피도 눈물도 없다는 서울에서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학교가 재미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집 가까운 곳에, 뺑뺑이로 주어진 환경이니 내게 맞을 확률은 높을 수 없다. 그러니 내가 맞춰야 하는데, 불행히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말 통하는 동성의 친구를 만들기도 내겐 어렵기만 했으니까. 마음 맞는 이가 없으니 당연히 학교도 내 학교다 싶지 않았다.
명문대를 들어가면서 기대가 컸다. 돈 많이 벌 기대, 대기업에 취직한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든든한 선배, 멋있는 지도 교수를 그리며 입학한 학교는 남의 학교 같았다. 말 나눌 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몇 되지 않는 여학생들이 캠퍼스 커플이 되고 나면, 그들은 동성 친구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그들이 자꾸만 교내 CC가 되는 이유를 나는 사실 알고도 남았다. 나 또한 어떻게든 여기가 내 학교다 싶은 마음으로 살고 싶었으니까.
CC였다가 결혼까지 한 절친의 말이 아프게 찔러온다.
"졸업하고 만나는 학교 사람이 하나도 없어? 심하다."
그거야 너는 우리 학교 나온 남편이 있으니까 그렇지. 네 남편 아니었다면 너도 그들을 만날 일이 있었을까? S대 졸업이라는 한 문장은 칸칸이 나눈 아파트마다 한 명씩 존재하는 돌봄 노동자인 주부에겐 그 어떤 구속력도 가지질 못한다. **대 졸업 그리고 선후배의 끌고 당김이란 여성에겐 해당사항이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외로운 나야 외로움을 잘근잘근 씹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외로운 늑대로 가정이라는 황야에 살아온 지 한참이니 익숙하다 하지만 딸은 어째야 하나 싶다. 학부모총회 안내자료에는 작년 어느 학교로 진학했는지가 장표로 기록되어 있다. 여자아이에게 이게 무슨 소용일까 싶다. 어째야 하나. 학부모총회는 외로움만 짙어지게 한다. 고민만 깊어지게 한다. 학교를 사랑하는 큰 아이에 대한 고민이 멎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나와 딸, 우리 두 여성이 마주하는 고독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사진: Unsplash의Marek Sztu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