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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Mar 29. 2024

용감하게 기쁨을 나눠보자.

용감해지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나의 용감의 범위는 아는 사람이라는 경계에 놓여있기 때문이겠다. 작은 중년 여자가 용감하게 굴 경우, 상대가 당황하여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상대의 반응이 생전 처음 보는 반응일 수도 있어서 겁이 난다. 

 분명 2명이었다. 오피스 타운인 판교에서 퇴근하여 강을 건너는 임산부 2명이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주변이 아니라 임산부석 주변에 있었다 하겠다. 지난 글에서 그간 앉아보지 못한 임산부석에 실컷 앉아본다고 말했는데, 사실 글을 올리고 난 후에는 다시는 앉지 않았다. 배려받지 못한 지난 세월을 이제 와서 부르짖어 본들 무슨 소용인가. 시집살이 산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 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싶었다. 시간은 흘러 지나갔고 나는 오늘에 맞게 살아야 하며, 내가 당한 바를 오늘의 누군가가 당하지 않게 움직여야 하는데 말이다. 

 신분당선엔 임산부석이 선명한 핑크색이다. 다른 지하철들의 경우 내부가 노후되어 있는 편이라 핑크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데, 신분당선의 경우 반짝이는 알루미늄 색의 광택빛이 세상 다정한 핑크에게 보색효과를 일으킨다. 그 남자가 앉아있었다. 보풀이 인 마스크를 쓰고 있는 젊은 남성이 임산부석에 앉아있길래 한참을 그를 살폈다. 그는 나의 눈길을 느꼈을 터인데, 핸드폰 속 메모장을 들여다보며 안절부절못한다. 싼 갤럭시 기종이라 그의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한숨을 쉬었다가 눈을 감았다가 하는 그를 관찰하는 동안 그녀들이 임산부석을 향해 퇴근 인파에 떠밀려 들어왔다. 

한 명은 임산부 배지가 보이게 가방을 들고 있었고, 한 명은 임산부 배지를 프라다 백 손잡이에 달기만 하고 배지 자체는 숨기고 탔다. 배지가 보이게 탄 그녀, 일어나지 않는 임산부석의 남성이 민망한지 퇴근한다고 남편에게 하트를 발사한다. 퇴근길 뺵빽한 인파에 그녀 옆에 키 작은 여자가 그녀의 카톡창을 흘깃 볼만큼 바짝 다가서도 어색하지 않다. 두리번거리다 그녀는 옆 칸으로 이동한다. 그녀의 이동 덕분에 한숨을 돌렸다. 

휴우....

용기가 있다면, 내게 어떤 크기든 용기가 있다면! 

"임산부석에서 나와주시겠어요?"

그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말을 건네었다가 그가 주먹을 휘두르면 때마침 들고 있는 무지개색 우산으로 그를 막을 순발력을 발휘해야겠다. 그에게 말은 어떻게 건네지? 목소리가 작은 편인데, 볼륨 조절을 해야 하나. 절간처럼 숨 막히게 조용한 신분당선에서 어느 정도의 크기로 말해야 적당할까? 

이 모든 고민들은 그녀가 이동하면서 한 방에 해결되나 보다 했다. 아뿔싸, 왼쪽에 명이 있었다. 그녀의 진핑크 임산부 배지 끈만 보이고 배지는 그녀의 손가방 속에 숨어있다. 그녀는 구역 배지를 꺼내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참 부른 배와 푸석한 얼굴, 무거운 배로 젖혀진 어깨와 편안해 보이다 못해 낡아 보이기까지 하는 운동화. 왼쪽 곁에 서있어서 가자미 눈을 하고 그녀를 살피니라 눈 끝이 시큰할 지경이다. 


그 남자는 이제 엎드렸다. 후욱하고 숨을 뱉더니 가방을 끌어안은 체 허리를 구부렸다. 이제 그에게 임산부석에서 일어나라고 하려면 등이라도 두드려야 할 판이다. 그에게 말을 건넬 기회는 망설이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진땀이 났다. 작가라는 인간이 이리도 비겁하다. 


퇴근인파로 한창 빡빡한 열차를 탈 일이 내겐 거의 없다. 출퇴근 경로는 겨우 지하철 3 정거장이다. 퇴근 시간도 3시 30분에서 4시 사이다. 이건 다 큰 아이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의 첫 모의고사 날이다. 작년까지 만 3년 동안 시험이 있는 날은 아이가 학교에서 10시면 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컴컴한 방에 들어가 누워있다 말다 했었다. 한 명이라도 아이와 시험 끝난 조촐한 파티, 아니 떡볶이 한 접시를 함께 해줄 이가 없었다. 그랬던 아이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내 전화를 받는다. 

아이는 시험이 끝나면 아이들과 만날 약속은 없으니 분당에 있는 치과에 갈 수 있다고 했었다. 남자아이들은 미리 약속을 잡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준비하기 선수인 나는 알지 못했다. 2 정거장이면 도착하는 집을 지나 아이 학교와 치과의 중간 즈음인 정자역으로 향했다. 시험이 끝난 지 30분이 지났는데 아이에겐 카톡 답장도 전화도 없다. 느낌이 좋다. 이 녀석 누군가랑 떡볶이를 먹고 있는 거다. 

3번 만에 전화를 받은 아이는 옆 친구들이 있든 말든 내게 큰 소리로 말한다.

"엄마, 나 수학 1등급인 거 같아!"

응. 치과는 오늘 못 가는구나. 아이 주변이 떠들썩하고, 아이는 벨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울보 엄마는 눈물이 난다. 인간은 신기하게도 기뻐도 울고 슬퍼도 운다.

 나를 찾아온 오늘의 행운은 이 두 명의 임산부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진땀만 흘리며 임산부석에 앉은 그 남자를 쳐다본다. 왼쪽에 선 배가 꽤 부른 그녀는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앉을자리가 생기나 싶어 연신 두리번 거린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리는 강남역, 나도 내릴 차례다. 4 정거장이나 기다린 그녀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내릴 준비를 하는 사람 앞에 서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녀가 앉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들기 위해 동선 중간쯤에 서본다. 

이렇게라도 바라본다. 오늘 나를 찾아온 기쁨이 새끼를 치고, 내 손에 쥐어진 행운이 꽃을 피우고 씨를 뿌려서 더 많이, 더 크게 내게 돌아오길 바라는 이기심이다. 행복함에 눈물이 차오르는 이 순간 용기를 내고 싶어 진다. 누군가 저 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에게 외쳐본다. 내게 행복을 1을 준다면 기꺼이 세상에게 10으로 돌려주고 싶은 게 지금의 심정이라고, 그러니 자꾸자꾸 행복하게 해달라고 소리 질러본다. 

다음엔 크게 용기내고야 말겠다. 

"저기요. 임산부석 자리 좀 비워주세요." 

 사진: UnsplashAlicia Petr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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