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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pr 17. 2024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글이 나오지 않을만큼 별 탈 없는 시간들이다. 남편과 투덕거리지만 선을 지켜가고 있으며, 친정엄마와의 소통도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힘들 땐 요령껏 빠진다. 큰 아이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학교로 간다. 새벽같이 나가 밤이 늦어야 돌아오니 아이의 얼굴을 볼 시간이 금쪽 같다. 작은 아이는 늘 그렇듯 가족들이 잘 지내면 아이 또한 온 몸으로 기뻐하며 하고 싶은 것을 힘차게 해 나간다. 작은 아이를 보면 내가 어디쯤 있는지, 나는 어떠한지 알 수 있다. 딸은 리트머스처럼 내 기분을 옮아간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 수 없어 글과 책에 기대어 살던 시간의 치열함이 사그라들자 이 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복받쳐 써내려간 글들은 어제 취해 술 김에 뱉어둔 토사물들 같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울증이 심할 땐 거울을 볼 수가 없었고, 씻지 않았다. 샤워실에 들어가면 나를 바라봐야하고 세수를 하면 스스로의 시선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세수 하지 않고, 샤워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지 않으며 화장실은 물론이고 샤워실에서도 거울은 피하기가 필수였던 시간이였다. 

 겨우 겨우 얼굴을 쳐다볼 수 있던 때와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려가고 쓰다 울다 하던 시간은 함께 맞물려 돌아간다. 지하철을 간신히 타고, 땀을 흘리며 지하철이 무사히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길 빌던 그 때 지하철 몸통 쇠에 비친 내 실루엣을 간신히 바라보았다. 작고 늙은 한 여자가 낯설게 홀로 서 있었다. 


오늘 아침은 17년 전, 길 가다 마음에 쏙 들어 샀던 검은 정장을 꺼내들었다. 제발 맞아야할터인데. 등과 팔뚝에 두둑해진 살들이 부디 이 옷은 들어갈 만큼만 붙어길 빌면서 입어본다. 다행이 신축성이 있는 재질이라 입어진다. 배에 들어갔던 힘을 빼도 되겠다. 옷이 내 몸을 허락해 주었다. 

출근하며 버스 정류장에 비치는 옆모습도 살피고, 지하철도 기꺼이 기다리며 앞모습도 바라본다. 괜찮다. 17년전에 산 옷이지만 입은 횟수는 10번이 채 안되는데 돈 굳었다고 혼자 신났다. 오늘은 사고 없이 일도 잘 풀릴 거 같다. 꽤 괜찮은 나로 보이는 그런 날이다.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한다. 끝날 때까진 끝이  아니란 걸, 내 부모와 내 형제, 가족 특히 남편은 알려준다. 삶으로써 알려준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며 발이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택시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모르겠다는 흐느낌을 듣고 30분만에 나를 델리러 온 그를 위해 저녁을 짓는다. 그가 좋아할 것이다. 퇴근한 그와 마주앉아 동료 욕을 하고 일에 대해 투덜거리는 그냥 이런 아무렇지도 않으며 아무 일도 없는 오늘을 위하여 우린 계속 살아야만 한다. 


  사진: UnsplashAndrew Key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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