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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pr 18. 2024

나를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고

나를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처음 사준 인형은 바비나 주주라는 이름을 갖지 않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글래머러스한 서구미인이었다. 그 미인이 내가 되어, 돼지저금통을 깨서 집을 사고 인형 주변 모든 것들이 인형이 원하는 대로 인형을 중심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가족 안에서 가정 안에서 나와 마주한 인연들이 나를 중심으로 배열되어있어야 한다고 여겼듯이 말이다. 

 

 남편의 둘째 누나를 처음 본 순간 문방구에서 가운데에 진열되어 있던 인형을 기억했다. 작은 머리와 하얀 피부, 걔다가 나에게 호의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내는 그녀는 처음 인형을 만났던 때를 불러일으켰더랬다. 그런 그녀의 딸은 의사인 남편과 너무나 닮아서 그녀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어깨가 넓고, 얼굴이 각져 둥근 머리가 작지 않은 크기였다. 

독일에서 돌아와 오랜만에 그녀와 그녀 가족을 만났다. 조카는 미국 대학 준비에 열을 올리니라 나와 보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녀가 내 눈엔 여전히도 바비인형인데, 어느덧 그녀가 50을 넘기다니 싶었다. 

"밖에 나가면, 엄마라 그러면 깜짝 놀라잖아. 우리 **이가 성숙해 보여서. 근데 **이는 그런 말 진짜 싫어해."

나보다 젊어 보이는 우리 엄마, 나보다 예쁜 우리 엄마, 남이 나보다 우리 엄마가 더 예쁘다고 한다면 사실 난 신날 듯하다. 그녀의 말에는 미모에 대한 여럿의 눈이 좋지만 딸에게 눈치가 보인다는 뉘앙스가 풀풀 묻어난다. 


아이들의 엄마라는 입장으로 마주하는 관계들이 늘어나고 있다. 학교의 운영위원도 그렇고, 아이들과 같은 학년 같은 반 학부모들도 그렇고, 담임선생님이나 과외 선생님과도 호박씨라는 사람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보호자로 만난다. 무대라 치면 조연은커녕 배경이나 조명 담당 정도랄까. 그도 아니다. 그들이 주연인 무대 배경으로 서있는 나무가 나란 사람인 게다. 

이 사실을 잊고 살 때가 있어, 부모답지 않다 싶은 순간이 하루 중 존재하는 날은 학교에 갈 일이 있거나, 학부모 단체 톡방에 들어갔을 때인 듯하다. 어디까지나 아이가 학교 안에서 그리고 학교 밖에서 꿀 같은 순간을 맛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섰는데, 무대 배경인 내 본분을 잊어버리고 주연 자리를 뺏고 싶어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이 오는 게다. 

본분을 잊었다면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면 되는데,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지지부지 변명하며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이는 나보다 어리니, 내가 아이의 보호자니, 내가 더 살았으니까 주연이 되어 목소리를 높여보는 그 짜릿함을 좀 더 누리고픈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딸 아이가 입다만 티셔츠를 입고 이 글을 쓰고 있다. 프린팅이 다 벗겨져서 Smile이라는 글자가 흐릿해졌고, 꽃무늬 모양의 꽃잎이 몇 개 남지 않았다. 티셔츠 아래 잠옷 바지는 동생이 작년 생일 택배로 보내준 선물이었는데, 겨우내 보드라운 것이라면 뭐든 좋아하는 아들에게 뺏겼다가 더워진 날씨 덕에 겨우 되찾아온 벨벳 파자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사실 내 것은 목숨도 내놓을 판이라는 게 부모인데, 그런 부모로 살고 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자신이 없다. 내가 아이들에게 양보한 건 고작 파자마인 걸 아닐까? 

 자본주의는 그 영향력이 대단해서,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수고와 금전적으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 특히 희생과 양보는 사회에서 미덕으로 권해지고 있지 않다. 내가 숨 쉬는 시공간은 자본주의의 모델이 되는 한국이라 누구도 아이를 낳지 않으며, 누구도 기꺼이 자녀를 기르려고 하지 않아 출산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곳이라, 나 또한 예외이지 않다. 예외이고 싶지만, 내 본분을 지키고 싶지만 쉽지 않다. 인정받고 싶고, 나로 살고 싶은 마음은 늘 부모 됨을 망각하게 해 배경을 찢고 무대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 받고 싶고 싶은 욕망을 칭찬한다. 그래, 희생 따윈 잊어버리고 당신이 당신 삶의 1등이고 주인이야! 

 오늘의 세상이 내게 건네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면 안 된다. 우린 귀를 막고, 조용히 어둑한 뒷자리로 물러서야 한다. 나는 부모니까. 자본주의 세상이 내지르는 고함에 귀 기울여선 안된다.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태양을 배신하지 않고 한결 같이 그 주의를 도는 지구에겐 태양이 늘 자애로운 빛을 아낌없이 선물하듯, 부모가 치르는 희생과 양보엔 끝도 없는 행복이 쏟아져내린다. 잊지 말자. 어둑한 배경으로 기꺼이 물러서는 당신에겐 아이의 사랑이라는 보답이 쥐어진다. 


사진: UnsplashJacqueline Munguí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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