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미루던 치과행이다. 남편도 아이들도 부지런히도 치과를 챙겨갔다.
"그렇게 찍소리도 안 하고 잘 가네?"
진짜다. 남편은 한마디도 안 하고 잘 간다. 가고 싶다, 가고 싶지 않다 이런 소리 없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가끔 자형의 동창이 하는 치과만 꾸준히 몇 년째 다니고 있으니 혹시 견적 비교를 해봐야 하는 게 아니냐, 치과 진료비가 비싸니 다른 치과로 다녀볼까 정도의 돈에 관한 코멘트가 그가 하는 이야기의 다다.
입냄새가 나고, 양치하면서 피가 나도 참아 보다가 결국 나를 위한 진료 예약을 잡았다. 차가운 음료와 과일은 물론이고, 김치를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병원에 간다. 엄마, 중산층 외벌이 주부라는 두 정체성이 치아 상태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스스로에겐 신경 쓰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상태를 살피는 게 마치 내 일인 양,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만이 보살핌과 돌봄을 받을 가치가 있는 냥 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취업을 한 나도 치과 치료받을만한 것이다. 말로는 가사노동과 돌봄의 가치를 부르짖지만, 누구에게도 이해받거나 끄덕임을 받지 못하였으니, 사실 난 스스로를 돌보지 않아 왔던 게 분명하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긴 시간의 대가는 참으로 크다. 번아웃, 갱년기, 화병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린 스스로를 돌보지 않아 벌어지는 증상들에 대해서 이름 붙인다. 내겐 대가가 치과치료다. 견적이 100만 원이 나왔다. 잇몸 스케일링, 충치치료, 떨어져 나간 크라운 다시 씌우기 등등 갖가지 종류의 서비스다. 서비스 견적보다 더 많은 돈이 통장에 찍히기 시작하니, 비로소 서비스받기를 받아들인다. 이게 뭔가? 가스라이팅도 이런 가스라이팅이 없다.
" 뭐 먹고 싶어?"
식구들의 끼니를 준비하고, 식재료를 장보고 준비하면서 사실 먹고 싶은 게 사라졌는데, 그건 준비하는 과정이 고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뭔가를 원하면 뭔가를 해야 하기에 적어도 나라도 원하지 말자 싶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 취향이 뭐였는지는 잊고 살아왔다.
내게 즐거움을 주는 건 무엇일까?
참고 견디고 책임을 행하는 과정의 무게를 털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찰나를 만들어 보고 싶다. 경력이음과 월급이 내게 말한다. 이젠 너 자신을 좀 찾아보면 어떻겠어?
입을 벌리고 치료실에 누워있으니, 긴장이 되어 어깨도 손도 발도 뻣뻣해진다. 이래서 치과 오기 싫었던 거야 싶다. 참고 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입을 벌려 돈을 들여서까지 고통을 참기엔 억울하니까.
그래도 이왕 온 바, 피 같이 벌은 월급을 내고 받는 서비스이니 다신 오지 않게 잘 치료받아야겠지? 자꾸 다물어지는 입과 의사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얼굴이 느껴진다. 무슨 생각을 해야 이런 나를 달랠 수 있을까?
맛있는 거,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지낸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불쾌한 소리를 들어야 하고,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하나 싶어 억울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면 행복한 기억이 필요하다. 맛있는 거 뭐 있을까? 치과 치료 끝나면 뭘 먹을까 생각하려다 입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게 생각났다.
키스. 먹는 거보다 훨씬 짜릿하지. 키스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떠올려보았다. 한 번도 몇 명과 키스했는지 새어본 적이 없네. 남편과 키스한 건 도대체 얼마나 오래됐을까? 첫 키스를 떠올리니 스케일링 기계 소리가 잦아든다. 그렇고 보니 그 시절엔 이 사람 저 사람 궁금해서 많이 만나고 다녔고 나름 연애경험이 많은 편이야 하며 기억 회로를 돌리다 보니 치료가 끝나버렸다.
치과 치료 덕분에 꽤 가벼워졌다. 잇몸을 무겁게 했던 치석을 제거하는 시간만큼 20년의 키스 역사를 되돌려 보았으니 입 속보다 마음이 더 가뿐하다. 몸이야 50을 달려가고 있고, 집에서야 내가 낳은 아이들이 20에 더 가까워져 가고 있으며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다. 나이 듦에 슬프지도 애닲지도 않은 이유는 고통이 다가와도 잊을 요령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잇몸 스케일링 때는 키스의 경험을 되돌려 볼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로워졌으니 말이다. 기운이 달리면 요령으로 산다. 돌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돌보기 시작하면 된다.
오늘도 곰처럼 아무 말 없이 출근해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어제 끓여둔 갈비탕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며 행복해한다. 그에게 물었다.
"작년 내내 치과 다니면서 말이야, 치료받을 때 무슨 생각해?"
" 언제 끝나나 생각? 흠.. 아무 생각 안 하는데?"
그래. 다행이야. 곰돌이 같은 우리 남편은 되돌려볼 키스의 경험이 없는 걸로다가! 이 맛 저 맛 짜릿한 뭔가를 즐기며 살지 않는 남편은 오늘처럼 꾸준히 늙어갈 예정이고, 그와는 정반대의 나는 한창때를 되돌려보며 오늘도 내일도 늙지 않고 살아갈 예정이다. 키스의 기억과 치과 치료로 스스로를 돌보며.
사진: Unsplash의Point Norm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