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만나는 사람은 없으세요?"
없다. 전혀. 나의 하루에 대해 묻는 질문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오늘을 풀어내어가니 돌아오는 질문이 이런 거였다. 가족 그리고 얼마 전 입사한 회사 외의 그 어떤 관계가 없나요? 그렇다. 없다, 전혀.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간단했다. 경력을 이어가는 여성이 겪는 현상에 대한 자료를 조사한다고 하니,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와 같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네 싶었다. 그런 멋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여자일까, 남자일까? 나이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일과 여성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연구를 하는 교수쯤 되는 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였다. 여러 가지의 학위가 있는 것으로 보였고, 그녀에겐 연구를 돕는 젊은 조교도 있었다. 10만 원의 인터뷰료가 없다고 해도, 기꺼이 하고자 했었겠지만 인터뷰에 응하는 시간이 대가가 다른다면 최선을 다할 이유가 되겠다. 그녀의 연구는 인터뷰이에게 10만 원을 지불할 수 있는 재원까지 존재한다.
그녀에겐 신입사원의 시절이 없었을 것 같다.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학생에서 선생으로, 세상과는 동떨어진 학문이라는 성벽 안에서 곱게 지냈을 것 같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명품 귀걸이를 바라보며 인터뷰를 하다, 현타가 계속 뒤통수를 쳐댔다. 난 왜 여기서 그녀의 인터뷰이가 되고 있는가. 대학 입학 성적은 내가 훨씬 뛰어났을 것 같은데. 학문으로의 길로 나아가길 그 누구도 내게 권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취직해야 하고, 어느 시기가 되면 당연히 시집가야 하며, 아이를 나을 시기가 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하는 거다. 그렇게 늙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인터뷰하는 명품귀걸이의 그녀는 내 나이이며, 그녀 또한 아이가 있다. 경력을 이어가면서 얻게 된 양육과 삶에 대한 태도를 이어가자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제가 요새 고민하고 있는 건데 뭔가 답을 주시네요."
내가 그녀에게 답을 준다니 분하다. 치열하게 쓴 입사원서, 간 졸이며 본 인터뷰, 무너지는 나를 부여잡으면서 마주하는 프린터기와 회사로 걸려오는 유선 전화의 시간들이 영화처럼 줄줄이 스쳐 지나간다. 추접스러운 순간들로 내가 얻은 진주들을 그녀가 아무 노력도 없이 채취해가고 있다. 당장 시간당 10만 원짜리 이 인터뷰를 집어치우고 싶다. 내겐 뭐가 이렇게 다 어렵고, 그녀에겐 뭐가 다 그렇게 쉽단 말인가?
그녀에겐 연구실이 있을 것이다. 사회적 기업의 팀장인 그녀는 사무실에서 이 줌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방금 전까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저녁메뉴가 뭐 나고 묻는 딸에게 5시부터 안방 침대 옆에서 인터뷰를 할 예정이라고 안방에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내겐 내 방이 없다. 이 글을 쓸 작업실 또는 책상이 없다.
딸을 바라본다. 아이에겐 무엇을 권해야 할까? 진주를 만드는 삶, 진주를 따는 삶. 살이 에이는 아픈 상처로 맺히는 눈물 같은 진주를 만들어내는 오늘의 나를 아이에게 권할 수 있을까? 인터뷰에 임하기 전 분명 경력을 이은 내가 자랑스럽고, 이 과정이 어렵지만 기꺼이 나서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세상을 향해하고 싶었었다. 딸을 마주한 순간 부디 경력을 잇지 말고 넌 그냥 구경꾼처럼 힘들지 않게 수박 겉핧기만 하는 우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빌고 싶다.
이기적인 인간.
그게 나, 호박씨다.
어제저녁식사로 지어둔 찌개와 밥을 도시락으로 싼다. 싸간 도시락을 혼자 까먹는 점심시간이 이젠 익숙하다.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한다. 학원 시간이 제각각인 아이들과 야근과 회식도 있는 남편의 스케줄을 잘 맞춰서, 그들과 저녁을 함께 먹으려고 내 시간을 맞춰본다. 그렇게 하루가 다다.
혹시 경력이은 여성이 사회적인 관계를 만들어 냈을 것이란 기대를 했던 걸까? 그녀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질문 의도를 나는 알 수 없다. 대답하기가 부끄럽다. 10개월의 경력이음으로 인턴 딱지를 떼기만 해도 버거웠는데, 사회적 관계라니. MZ 들과의 회식은커녕 인간적인 소통도 한치의 발전이 없는 오늘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주말이 되면 자기 바쁘다. 주말도 이어지는 아이들의 학원과 과외 스케줄 맞추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부모님. 주말은 그들도 챙겨야 한다. 10개월치 동안 새로 접한 사회라는 세상은 업무 시간 외엔 한 조각도 내게 포함되어있지 않다. 나는 뭘 바랐던가? 뭘 바라고 있는가?
인터뷰를 계획한 교수가 생각했던 거보다 인터뷰의 효과는 훨씬 크다. 나, 그리고 딸, 가족과 나를 둘러싼 관계들의 좌표를 찍는 날이다. 시간당 10만 원을 받을 게 아니라 줬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