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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l 24. 2024

여행의 주인공은 누구

 눈을 감으면 바삭한 바람이 스스 부는 독일 오버오젤 시립 수영장이 생각난다. 야외 수영장 풀밭에 누워 눈을 감으면 이건 천국이구나 했다. 지독하게 외로운 천국은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었다. 아이들 둘은 차가운 물이 발목까지 적당히 오는 야외 어린이 풀에서 서너 시간을 거뜬히 놀았다. 외로워서 책을 읽었다. 귀한 한국책을 읽어대도 혼자라는 사실은 치밀어 오르 곤했다. 남편은 지금 어디쯤일까? 그는 어디서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을까? 오롯이 혼자인 천국은 천국이 아니다. 

 겨우 설악산행을 계획하면서 좋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남기신 늙은 회원권을 남편은 소중히 양도받았다. 마치 아빠의 유품을 다루듯이 말이다. 남편의 세 누나들은 호캉스를 즐기고, 호텔을 좋아하는 이들이라 남편의 선택에 맞장구쳐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읽기에 반대하지 않았고, 마뜩지 않았지만 기꺼이 그가 공을 들여서 양도받은 회원권을 신나게 써주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러니 남편의 신바람은 한층 더해진다. 일정을 잡고, 숙박가격을 더 할인받을수록 그의 즐거움은 더 커진다. 게다가 친정 부모님을 대동해서 가게 되다니, 이 모든 것을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할 생각을 하니 50 평생을 누나 셋의 막내로 살아온 그에겐 생각만 해도 멋진 계획이다. 

 그의 마음이 훤히 보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동선도, 식당도,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뒤치다꺼리, 예를 들면 아이들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체험학습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운전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아버지에게 리조트 이름을 알려드는 등의 수고는 절대 티 나지 않게 했다. 그림자처럼 그를 도와주는 것, 그를 주연으로 만들기 위해선 필수이다. 

 그는 기꺼이 주연을 맡았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리조트 현관의 카드키가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이마를 찌푸렸지만 그러려니 했다. 카드키를 교체해 주러 온 직원에게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재차 이야기하려고 나서자 그가 직원 앞에서 나를 말렸다.

"어지간히 알아서 할까 봐."

 그가 말리거나 말거나 더운 날씨에 리조트 밖에 앉아 고만새 노인처럼 앉은 친정 부모님을 보자 빠른 문제 해결이 답이다 싶어 후속 조치를 단단히 직원에게 일렀다. 그땐 몰랐지. 그가 주연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할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첫째로 평생을 살아온 나, 앞으로도 그렇게 믿음직한 장녀로 살아갈 나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교체 배정해 준 숙소에 들어오자 그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마루 소파에 앉는다. 말을 걸어도 답하지 않는다. 엄마, 아빠 다 계신데 말이다. 아빠는 초행길 운전에 긴장감이 풀리지 않아 침실에 들어가서 누우셨으니 다행인데 눈치가 빠른 친정엄마한테는 죄송하기 이를 데 없다. 어쩐다. 

 엄마에게 카카오톡 사진 보내기 방법을 알려드리는데 30분 정도 쓰고 났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굳게 다문 입의 남편을 보자 생각 하나가 슬그머니 나를 찾아온다. 

"내 부모님 앞에서 저렇게 철딱서니 없게 구는 사람을 믿고 평생 살아야 한단 말인가?" 

못난 사람을 선택한 것은 나이니, 이제 내 탓으로 화살이 돌아온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불안이 나를 압도하려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그만! 

 " 엄마, 우리 산책하자."

 마침 거실로 나오신 아빠까지 산책에 합류다. 아이들에게 부탁을 했다. 눈치가 빠른 둘째는 나와 남편을 번갈아보더니 하고 있는 게임만 끝나고 함께 하겠단다. 둘째가 나간다고 하니 첫째도 슬그머니 엉덩이를 띄어본다. 큰 아이가 이젠 제법 말을 듣는다. 아이의 사춘기는 정말 물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또 증명되는 순간이다. 




리조트는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진 곳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고도가 높아 습도도 서울보단 낮은 편이다. 

 탁 트인 곳에 가니 10년 전의 어린이가 듯이 싸다니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엄마가 탓을 하기 시작한다. 듣기 싫다. 누구 탓이 어디 있는가? 그저 일어났을 뿐이다. 엄마까지 보태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자책한다. 공황발작이 올 때까지 나를 밀어붙인 적도 많았다. 그 시간들을 나는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 그러니 엄마의 입을 막을 뿐이다. 

" 엄마, 탓 그만하자. 누구 탓이면 뭐 해? 우리가 자리를 비워 줬으니까 사위 기분 풀리길 빌어보자고요."

".... 사위 좋아하는 와인 사갈까? "

엄마는 천재다. 실타래처럼 엉킨 감정들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게 엄마는 아이디어를 내민다. 엄마 남편이 아니니까, 우리 엄만 괜찮은 노인이라 내 말을 귀 기울여주니까 우린 이렇게 헤쳐나갈 수 있는 게다. 

 남편이 좋아하는 가성비 갑 호주 와인 한 병을 들고 들어오니 그가 숙소 거실에 없다. 담배를 한 갑 사서 피우러 나갔다.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더니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양치를 한다. 

" 점심에 먹은 홍천 막국수가 소화가 안되네요. 장인, 장모님. 저 먼저 들어가 보게요."

단정히 인사를 하고 그는 방으로 들어간다. 다시 그로 돌아왔다. 예의 바르고 반듯하며 괜찮은 사위가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담배는 이럴 때 보면 참으로 기특하다. 주재원 시절, 그가 독일에서 한 갑 넘게 피운 담배 때문에 피부와 치아색이 어두워졌었다. 일하다 죽는 게 가니라 담배에 절어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는 지독히 말랐었고, 지독히 담배를 피워댔고, 거의 끼니를 먹지 않았었다. 그 시절의 담배와 오늘의 담배는 다른 담배다. 



 지방 소멸은 강원도 또한 덮쳤다. 남편이 선택한 왕골마을과 화진포, 고성 어디에도 관광객을 찾긴 쉽지 않았다. 마치 남편의 고성, 우리의 강원도 같았다. 한적하니 아빠는 느긋해 보였고, 엄마는 사위를 거푸거푸 칭찬했다. 사위가 없는 자리에선 엄마의 자랑인 큰 딸, 나를 칭찬하기 바빴다. 눈치껏 그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우리 엄마, 말없이 함께 해줌으로써 그를 지지해 주는 친정아버지 덕분에 남편의 어깨는 한껏 올라갔다. 

 겨우 설악산을, 강원도 여행을 사랑한다. 남편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시간이라면, 그 어디라도 기꺼이 사랑할 것이다. 

 천국 같은 어딘가로 주재를 다시 나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설악산 여행을 꿈꿀 것이다. 눈을 감으면 왕골마을 논길을 떠올릴 것이다. 숙소에서 구워 먹은 고성 칡소 맛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실 것이다. 그 어디든 혼자일 그곳은 천국이 아니다. 어디든 그와 함께 하는 그곳이 내겐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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