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고 앉아있는 그 모든 것에 감사를 느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라. 스스로에게 신이 되어본다. 나 자신에게 종교가 되어본다. 누군가의 어리석음이 계속 보여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날들이 연속이다. 한참 자라는 나이의 아이들에게도 종종 분노를 느끼곤 했었다.
여럿이 앉은 날이었다. 좋은 의도에서 생겨진 자리였었다. 킴은 70년대 초반에 미국에 입양된 한국인이었고, 킴에서 친절했던 이유도 값싼 동정심이었다. 그런 킴은 미국인들의 모임자리에 나와 아이들을 불렀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의 모음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갔던 수제 버거 레스토랑 이었던 지라 여느 날처럼 버거에 주스를 시키고 아이들과 나눠먹으려고 했었다. 킴을 비롯한 미국인 엄마들은 샐러드와 스파클링 와인을 시켰다. 체구가 큰 그들 앞에서 자그마한 내가 햄버거와 주스를 먹고 있자니 분함이 하늘을 찔렀다.
한참을 놀고 들어온 큰 아이가 샤워하고 나와 옷도 입기 전에 아이 엉덩이를 때리며 심한 말을 퍼부었다. 저주에 가까웠다. 너를 위한 거라고, 이상한 너를 바로 잡겠노라고 물에 젖은 아이의 피부를 떄려댔다. 그게 나의 바닥이다.
발가벗겨진 체로 손바닥으로 맞아야 했던 건 큰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그냥 그렇게 되었던 거였다. 그 모임은 선하다 못해 멍청하기까지 한 의도에서 비롯된 일이었을까. 그냥 그렇게 된 거였다. 산책길에 그 누군가에 발에 우연히 밟혀 목숨을 잃어버린 개미처럼, 그냥 그런 거였다. 탓을 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한 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오직 나이기 때문에 이다지도 불행한 순간이 나를 종종 찾아오는 것이다.
고통 없음에 감사할 줄 모르는 이에겐, 아무 일 없음에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에겐 증오와 분노, 자괴와 통증이 최고의 친구다. 회사를 나온 이유도, 나와야 할 만큼 몸이 아픈 이유도 그 모든 것의 시작엔 내가 존재한다. 나를 잊을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 거울을 부셔 창으로 만들어 나란 존재는 내 눈에 1도 띄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에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고통을 마주하고 싶다. 남몰래 스스로를 거대한 시간 안에 집어던져 넣어 몰입하는 누군가가 부러워 환장할 지경이다.
직원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며 생일 케이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고, 정신 차리라는 말에 침묵할 수 없었다. 다시 나는 누군가 밑에서 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죄스러움을 안고 가족들 앞에서 아무 죄도 없는 척 서있기도 싫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나.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엇에도 무해하며, 있었는지 없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연기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