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히도 다른 이들의 글을 읽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본다. 누군가의 퇴사에 관한 글을 읽고 나면 분명 비슷한 글을 읽게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100%보다도 더 멀리 더 많이 더 깊게 뼛속까지 제발 공감해 달라고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의 언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한 지가 언제일까? 브런치에 마지막으로 올린 글의 기록을 더듬어 본다. 퇴사, 너의 뒤에 서서야 내겐 글이 흘러나온다.
주섬 주섬 그간의 기록을 더듬어 본다. 어떻게 지냈던가? 글에 기대지 않고 살았던 직장인 또는 경력이음자의 2년 하고도 3개월의 기억은 위태위태하다. 순전히 내 기준에 기록이 없는 삶은 위험 그 자체다. 나 몸뚱이 하나가 통째 들어갈 수 있는 모래시계 속이다. 내 위로 모래가 쌓여간다. 입이 막히고, 코가 닫히고, 눈으로 모래가 쏟아져 들어온다. 암흑. 죽음의 상태와 다를 게 무엇인가? 산 채로 관 속에 들어가 본 게다. 내 영혼은 모래시계 속에, 내 육신은 모래 속에 파묻혔었다.
초기화. 지금 하고 있는 건 초기화다. 내게 주어졌던 짐, 월 200만 원이라는 수입을 뒤집어엎었다. 무섭고 두려운 날이 현재다. 초기화 그 자체 말이다.
그리고는 명절이다. 대단한 우연인 걸까? 간사하다 못해 갸륵하기까지 한 나의 계산 덕분이다. 절대 우연이 아니다. 1년 넘게 스멀스멀 괴롭히던 목 디스크, 그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하는 상황, 이 모든 타이밍은 철저한 계획이다. 7월 나를 향해서 쏟아붓던 대표의 폭언들 속에 이미 마음속 시한폭탄은 재깍거리기 시작했다. 아프다는 이야기에 부랴부랴 퇴사일을 정하고, 인수인계 기간을 최소한으로 잡으려고 하는 이 젊은이 앞에서 최대한 빨대 꽂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꿀 같은 10일 치의 월급을 금쪽같은 내 시간 하나 들이지 않고 받을 수 있는 걸로 스스로를 위로라도 해야겠기에, 이렇게도 난 싸구려가 되어간다.
싸구려.
무엇을 믿는가?
누구에게 기대는가?
싸구려 주제에 무엇을 믿으며 누구에게 기대어 살아가는가?
추락하고 있는 나를 공감해 달라고 남편에게 요구했다. 남편은 이해하지 못한다. 평생을 그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우린 같이 해야 하나 보다.
시댁에 도착했다. 단순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 천천히 저물어 가는 그들을 보면서 오늘이 나의 호시절이 아님을 감사해한다. 위안을 받는다. 타인의 몰락은 자신에겐 기쁨이다. 적어도 난 저렇게 저물어 가고 있는 중은 아니니까!
시댁 가길 잘했다.
퇴사엔 시댁이다. 나의 불행엔 남의 더 불행이 특효약이다.
이렇게 한 걸음씩 퇴사의 뒤에서 한 발씩 디뎌본다. 지극히 이기적인 나로 다시 돌아왔다. 이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시 생각에 사로잡히고, 다시 삶이 두려워지고 죽음이 그리워진다. 생각하느니 이 삶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밀려온다. 썰물처럼, 철썩. 다 시시하다는 마음이 철썩철썩 떠밀려 온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