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로 사용된다는 것, 그리고 사용되길 요청한다는 건 특별하다. 존재함으로써 귀하다고 하는데 존재함에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비 오기 전 개미들이 부지런을 떤다. 죽은 지렁이의 몸을 잘게 부숴 옮기기 위해서이다. 곧 물폭탄이 터질 것이란 걸 개미들은 알고 있다. 개미의 몸보다 몇 배는 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개미들은 양식을 옮겨야 한다. 얼른. 비 오기 전에 지렁이가 죽은 건, 그 지렁이가 개미들의 집 근처에서 죽은 것까지도 개미들에겐 행운이다.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는 기분에 살 맛 나는 기분이었었다. 쓸모 있어지는 기분에 취해 나도 이 회사의 주인인양 생각하고, 내가 느낀 감사함을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행복함을 나누고 싶었다. 그 행복함으로 박봉을 받는 기분을 이겨내고 있는 승리의 기분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었다.
덕분에 특수관계인으로 뭉쳐진 이 회사의 임원들에게 찍힘을 당했다. 뭐도 아닌 내가, 회사에서 멋있어지려고 하는 건 그들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만이 존중과 존경의 대상이 여야 한다는 걸 한참 후에나 깨달았다.
여기서 그들을 잘 사용하면 된다. 그들과 무엇을 나누려고 하기 전에,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된다. 맞출 필요도 맞출 수도 없다. 그들의 마음에 들건 안 들건 그들은 나를 내보내지 못한다. 200만 원이 채 안 되는 월급이 나의 몸값이겠거니 자폭하고 자기 연민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은 집어치워야 한다.
글을 쓰는 이들은 어쩌면 지독히도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욕심이 끝도 없어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는 이들이 분명하다. 법정 스님은 임종 직전 모든 원고를 태워버리라 하셨으니, 법정스님만 제회하고다. 한 자 한 자 적어 넣고 다시 읽어볼지는 않는다. 읽는 순간 몸 밖으로 나온 나의 일부가 지독하게 한심하다. 글을 도구로 쓴다. 글 또한 소중하고 사랑하는 현재의 나, 좌표 찍어진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누군가 읽으라고 쓰는 글이 아니다. 글을 쓰고 나서의 시점에 나를 포함한 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쓰인 글이 아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지극히 이기적으로 글을 쓰듯, 써 갈려내고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는 이 글처럼 회사도 그렇게 사용해 버리면 된다고 마음먹어본다. 선명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렷해진다. 지난 6개월간 흑백이었던 화면이 칼라로 바뀌는 순간이다.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좋아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내어놓는다. 무슨 상관인가? 지금 여기 존재함만으로도 이미 소중한 나이다. 죽은 지렁이의 몸뚱이처럼 어디서 어떻게 쓰일지는 책임질 수도, 제어할 수 없다는 걸 잘 받아들이자.
지금이 아니어도, 어떻게든 쓰일 것이다.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타인의 오해와 미움, 나를 향한 증오는 내 것이 아니다. 비 오기 전 개미굴로 끌려들어 가는 지렁이의 몸뚱이처럼 말이다. 징그럽게 생겼다고 누군가 지렁이를 향해 질색을 한다. 지렁이를 향해 분노를 퍼붓는다. 분노는 지렁이의 몫이 아니다. 분노로 시간을 채우는 이가 치러야 할 대가다. 이 삶의 0.1초도 10년도 100년도 다 삶이기에, 분노로 채우는 삶을 치르는 이는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고 표현한 이의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어지지 말고 부디 행복하자. 사랑하는 나, 부디 지혜롭고 아름답게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