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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녹슨 칼 13화

프로메테우스인 척 하는 이카루스

by 고라니


프로메테우스. 에일리언 시리즈의 프리퀄을 그린 영화의 이름이자,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준 그리스 신화의 신.



이카루스. 밀랍 날개가 녹아버릴 때까지 태양에 가까이 가버린 사나이. 잡아주는 이가 없어서 추락해 버렸다. 물론 날고 있다는 희열 때문에 아버지 충고를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이카루스는 애였다.



어떤 일에 두려움이 앞선다면, 그 일에 대한 호기심이 부족한 것이다. 이카루스는 호기심과 흥분감 때문에 태양과 가까이 날면 응당 느껴야 할 두려움을 잊어버렸다. 어떤 시골의 방화범도 그랬다. 프로메테우스가 그러라고 불을 준게 아닐텐데, 스티븐 킹의 소설들 처럼 불안정한 이들에게 손에 위험한 것을 쥐어주면 재미있는 일이 발생한다.






1978년 여름이었다.



산에 불이 났고, 대형 산불은 아니었지만, 집의 창고가 타버렸다. 다행히 이웃 주민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가끔 불이 나긴 했지만, 이번 산불은 분명히 누군가의 방화에 가까웠다. 날씨는 습했으며, 낮은 찌는 듯이 더웠고, 구름이 많았다. 모기가 가득했고, 그늘도 더웠다. 저수지 물도 더웠다. 이런 습한 날 자연적으로 불이 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떤 놈이 산에 기어들어가서 불을 피웠는데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거지. 더워 죽겠는데 말이야.



모두가, 흑인 노예 짐만큼 일했다.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은퇴는 거의 없었다. 다들 말 그대로 죽기 전까지 일했고, 대부분 최종학력이 초졸이었다. 굶진 않았지만 항상 배고팠다. 다행히 배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있었는데, 걸리면 각오해야 했다. 서리를 하거나 사냥을 했어야 했으니까. 여기는 수렵, 채집, 사냥이 농경사회와 공존하고 있었다. 동네의 모든 아이들은 허클베리핀이나 톰소여였다. 체제의 반역자이자 생존자였다. 왜냐면 도둑질을 해도 심하지 않으면 경찰서를 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눈치 있게 정도를 지켜가면서 했다. 경찰서에 가게되면 순사놈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당할테니까.



방화범은 톰 소여에 가까웠다. 왜냐면 허클베리핀보다는 뭔가를 더 아는 그런 느낌이 있었고, 무의식 중에 정신은 온전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자기 주관이 있었고, 고집이 있었다.



방화범 가출 소년 톰 소여의 말을 빌리자면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톰 소여는 너무 커버렸고, 흑인 노예 짐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서리를 하거나, 사냥을 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어린 톰 소여는 뭔가 결핍되어 있었다. 식량의 결핍뿐만이 아니라, 관심을 갈구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 회상은 일종의 개인적인 신화 낭독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방화 신화의 전말은 이랬다.






궁금했단 말이지, 처음에는 그랬어. 뭐 불 피우고 놀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으니까. 뭐 어디 개구리 잡아다가, 가재 잡아다가, 메뚜기 잡아다가 구워 먹으려면 불 피울 줄은 알아야지. 안 그러냐? 뭐든 처음이 어렵지 한번 해보면 어려운 것은 없어. 처음이 어려운 거지. 뭐 그게 큰일이라고.



근데 가끔 큰일이 나긴 하더라. 한번은 불이 크게 나버렸어. 창고에서 고구마 구워먹다가, 볏짚에 옮겨 붙더니, 창고가 타기 시작하는거야. 동네 사람들 다 나와서 구경하고, 나는 금방 잡히고 뭐 그랬는데, 큰일 났다 싶더라고. 한참을 타는 거 구경하다가 어른들이 나 잡아갔어. 큰일이긴 했고, 사고 친 건 맞는데,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보기만 했어.이야 장관이더라. 불이 점점 커지는데 발이 잘 안떨어 지더라고. 큰일이 난 것과는 별개로 정말 장관이었어. 오줌이 마려웠는데 오줌으로는 이 불에 택도 없겠더라.



근데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니까, 너무 큰 사고를 쳐버린 거야. 창고가 홀랑 타버리고, 산이 불타고 있었으니까. 대충 호미 하나 해먹으면 작대기 한 대, 아버지 말에 말대꾸하면 꿀밤 한 대, 뭐 그런 식으로 계산해 보니까, 아버지한테 이 사건으로 혼나면 3일을 밤낮으로 작대기질을 당할 거 같은 거지. 그러면… 나는 아마 죽을 텐데. 저번에 형 맞는 거 보니까 진짜로 죽겠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른들이 안 보는 틈에 불속으로 들어가 버려야 하나? 아닌 말로,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일 텐데. 알게 모르게 다들 나만 감시하고 있어서 그럴 기회가 없었어. 그런데 말이야.



옛날에는 너무 큰 사고를 치면 어른들이 혼내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어. 큰 사고를 쳐서 큰일 난 건 맞는데 말이야, 애도 사고 치고 놀랐을 거라는 거지. 그래서 불이 났을 때, 나는 뒤지게 혼날 줄 알았는데, 엄마 아빠가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 그래서 더 무서웠어, 피 말리는 기분이랄까, 뭐 시원하게 혼나면 그만인데, 딱밤 맞기 직전의 상황이 지속되는 느낌이었어. 결과적으로 혼나진 않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만큼 아빠랑 엄마도 적잖이 놀랬을 거야. 그래서 더 혼나지 않았던 거 같아.



불은 꺼지긴 했냐고? 마침 비가 오더라고. 그날 습하긴 했어.







무슨 이런 인간이 다있나 생각도 들었지만, 모든 사고와 사건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큰일이라면 큰일이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그냥 그런 사건으로 지나가는 뭐 그런 거지. 그는 그때 방화를 해서 누군가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평생 가지고 살기에는 너무 어렸다. 어쩌면 너무 가혹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운도 좋았고, 큰 사고 중에는 작은 사고에 속하긴 했다.



다행히 아무도 혼내지 않았으니까. 가끔 불을 가지고 노는 그를 보면 이따금 “왜 또 다 태워먹으려고?”라는 식으로 놀리는 게 전부였을 것이다. 그때의 어른들은 초졸이었지만 나름의 법칙이 있었고, 날개가 녹아떨어지고 있는 이카루스 정도는 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생각이 있는 이카루스라면 다음에는 날개가 녹을 때까지 높이 날지 않겠지라는 일종의 믿음도 있었나보다. 다들 프로메테우스 만큼의 전지 전능함은 없었지만, 나름의 정의감과 인간성, 인류애는 있었다.



요즘 그를 만나면 “내가 불질러봐서 잘 안다”라는 식의 장난을 치기도 할 만큼 그때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확실히 생존의 기록으로서 낭독할 만한 흥미 진진한 신화이긴 하다. 또 그때 이후로 그가 불장난을 졸업한 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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