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여름이 되면 주말마다 시골로 가서 옥수수 따는 것을 도와드리고, 옥수수를 쩌서 마을 앞 공원 도로에서 파는 일을 했다. 비가오나 바람이부나 여름에 시골에 옥수수가 있으면, 할머니는 항상 우리들 줄 것은 빼놓고 팔러 나가신다. 나는 가끔 따라나가는데, 할머니는 항상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열심히 옥수수를 파신다. “아니 우리 옥수수가 제일루 맛있는디, 이런 육시럴 자리를 잘못잡아가지구… 저 이장집 자리봐봐, 우리 옥수수보다 훨신 맛두 읎는디 잘만팔리네. 이런 젠장할.” 할머니는 썩어가는 손잡이와 녹슬어가는 쇠가 합쳐진 칼로 엄청나게 빠르게 옥수수를 손질하며 말했다. 나도 옥수수를 손질하며 듣고 있자니 무서워졌다. 옆에 있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저 칼봐봐.” “어, 왜.” “진짜 잔인하게 생겼어. 그 곡성에 나오는 칼같아.” 그 칼은 아무 빛도 반사할 수 없어서 더 잘 보였다.
어느 날 윗집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할머니를 찾아오셨다. “아니 진짜루 큰일날 뻔 했데니께.” 윗집 할아버지의 사건 은 대략 이러했다. 어저께 이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 길을 지나다니는데, 갑자기 눈 앞에 목 높이로 철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 땅 주인이 지나다니지 말라고 설치해 놓은 것 같은데 그때 마침 자기가 전화를 하지 안았더라면, 멈추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세상을 떴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옆에서 같이 옥수수 껍데기를 까던 아빠에게 말했다. “아니 이런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말하신데요?” “그러게 말이다. 옥수수나 까.” 이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저번에 들었던 경운기 사고를 당해서 세상을 떠나신 마을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그 양반이 몸두 불편한디 굳이 경운기를 끌고 나가서 말이여, 사고가 나버린겨, 누가 마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했는디, 그땐 너무 늦었지 뭐. 한 반나절을 그러고 있었나벼” 이 사건을 전하던 할머니의 표정은 이승과 멀어질 뻔했던 이장과 비슷했다. 할머니의 얼굴이 무서웠다. 분명 심장떨리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실은 이런 사건이 시골에서는 흔하다면 흔했다. 사람사는 곳이니까, 갈등이 없을 수 없고, 마을이 작고 소문은 빨리 퍼지지만, 밖으로는 잘 알려지는 법이 없어서 외지인이 듣기에는 더욱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지곤 했다. 사고는 항상 발생하는 법이지만, 밖으로 새어 나가는 법이 별로 없었다. 그냥 마을 안의 가십거리로 전락해버리고는 다들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왜 신고를 하지 않는지, 고소를 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을은 항상 조용했고, 평화로워 보였다. 이따금 누군가 마을 회관에 나오지 않는다면 그걸로 된 무슨 일이 있긴 한가보다 추측할 뿐이었다.
저수지변은 해마다 변하고 있었다. 돈이 많은 아산시는 저수지변에 돈을 마구 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수지 공원과 트랙을, 최근에는 주변의 부지의 용도변경을 허락해, 여러 카페와 식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 마을에 신흥 전원주택들이 생겨나면서 마을은 2개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마을의 이장은 마을 주변의 여러 공사가 발생할 때 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보곤 했다. 마을에서 가장 좋은 트랙터를 타고 지나가면서 “거기 상수도는 잘 했나?” 내지는 “그 땅은 그 용도가 아닐껀디” 등의 말을 던지고 지나갔다. 그럴 때면 건물주인이 이장의 집으로 찾아오기 일쑤였고, 이장의 말을 못 알아들은 사람은 공사 완공일이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누가 이장에게 무시무시한 짓을 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마을의 이장이었던 이장의 이런 짓은 한 두사람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음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아 – 아, 마을 여러분 – 오늘 비료를 배급할 터이니 – 받을 분들은 오늘 내로 회관 앞에 오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 “ 아빠는 이런 이장이 방송을 참 개갈않나게 한다고 했다. 나름 공식 공지사항이니, 서울 말투를 하려고 노력하는 이장의 방송이 퍽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주 뒤 시골에 다시 갔을 때, 할머니께서는 손을 다치셨다. 일주일 전 그 무섭게 생긴 칼은 할머니의 손을 베었다. 할머니는 대충 손가락을 알코올로 소독을 한 후에, 대충 거즈로 쫌매놓았다. 그리고 다시 장사를 하러 가셨다. 당연히 큰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차피 놔 두면 저절루 아물 것인데, 괜히 큰애한테 말 했다가 한 소리 듣고 공연히 귀찮게 병원에 갈 것이 뻔해서 그렇게 한다는 심산이었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팔순이 넘은 여자의 손가락이 아무는 속도는 매우 더뎠고, 할머니는 큰어머니의 손을 잡고 병원에 가셨다.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 잔인한 칼이 일을 저지를 것 같기는 했었다. “아빠 저번에 말했던 칼 있잖아.” “어 그게 왜?” “할머니 그 칼 쓰시다가 다치신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두 남자는 약간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요즘에는 그 칼이 어디 갔는지 도통 잘 모르겠다.